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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태조 집안의 고려 말까지의 상황
1.1. 전주 시절
1.2. 목조의 동북면 이주
1.3. 몽골에 투항, 천호가 되다
1.4. 원나라의 쇠퇴와 이자춘의 고려 귀향
2. 청년 시절
2.1. 왕이 될 꿈
3. 무장 시절
3.1. 불세출의 신궁
3.2. 세력
3.3.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4.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
5.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
6. 최후와 건원릉


1. 태조 집안의 고려 말까지의 상황

1.1. 전주 시절

본관은 전주 이씨. 때문에 이성계 본인이 전주에서 태어난 것은 아님에도 실록을 보면 이성계를, 또한 본인이 고려인이자 '전주 사람'으로 칭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 1권 총서 1번째 기사에서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동생 이린이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선 왕조는 왕조의 발상지를 전라도 전주로 하고 그곳을 풍패지향(豊沛之鄕)[1]으로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는데,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은걸 보면 이성계 자신도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린은 이의방정균에 의해 살해당할 때 죽지 않고 고향 전주로 돌아간다.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었던 남평 문씨 문극겸사위였는데, 장인어른이 조금 도와주었을 수도 있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약하였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이고, 나중에 추존되어 목조(穆祖)가 된 사람으로, 다시 이때부터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1.2. 목조의 동북면 이주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인만큼, 당연히 본래 이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전혀 다른 함경도가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은 조금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그 지역의 관리와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관기(官妓)를 건드릴 수 있을만큼 이안사 가문이 만만찮은 토호였다는 뜻도 된다.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그 내막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이가 지저분하게 된 모양으로 문제가 생긴 관리는 윗선에 연락하고 심지어 군사까지 동원해서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말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된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꽤 끗발을 날리던 가문으로 보인다.[2]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이형우)

1.3. 몽골에 투항, 천호가 되다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 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날에 문제가 생겼던 그 관리였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 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렇게 이주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그렇게 된 바에야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 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 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항복하는 편이 떡고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보인다.

산길의 주선으로 인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가 이안사를 위해 세워지고 이안사 본인은 천호장(밍간)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 이행리(추존 익조)가 그 기반을 이어 받았다. 1281년 이행리는 개경을 방문하여 충렬왕을 알현하고 원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했고, 이후 충렬왕을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며 계속 사과를 했다고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 나온다. 충렬왕은 이런 이행리를 보고 "경은 원래 사족(士族) 가문 출신이니 근본을 잊을리가 있겠느냐"며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3]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던 여진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태조실록』 1권 총서 9번째 기사


이행리는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고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적이 무려 300여 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이 물이 열려 자신들은 돌파하고, 다시 강이 물이 막혀 적이 추격해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이런 기록은 당연히 조작이겠지만, 여하간에 다시 기반을 날리고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의주(宜州,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로 와서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추존 도조)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로 옮겼는데, 소나 말을 기르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또 이춘은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양기의 딸 조씨와 결혼했는데, 이로 볼 때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세력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 벼슬을 했던 조지수의 아들은 항복하여 쌍성총관부의 총관이 되었다. 한양 조씨이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에서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내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4. 원나라의 쇠퇴와 이자춘의 고려 귀향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후계자를 놓고 내홍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타스부카(塔思不花)[4]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곧 죽고 말았다. 타스부카의 아들이었던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렸는데, 이춘의 부인 중 박씨의 아들이었던 타스부카, 이자춘의 세력에 대해, 조씨의 아들이었던 완자부카(完者不花), 나하이(那海)가 누가 해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로 나가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에서 박씨 쪽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이교주 대신에 임시로 이씨 집안의 대장이 되었다. 그 후 이자춘은 나해를 때려잡았다. 일단 기록으로는 이교주가 나이가 차자, 이자춘은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다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꽤 기민한 편이었던 이자춘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도 바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시도하려는 것을 파악했다. 또한 원나라에서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는 중서성,요양성,정동행중서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각각 구분하는 호적을 작성해 원주민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려는 것도 이주민 집단인 이자춘 일가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안이였다. 1355년 이자춘이 공민왕을 알현하자 당연히 도움이 절실했던 공민왕이자춘을 크게 환영하였으나 당장에 받아들이지는 않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자춘공민왕의 밀지를 받고 쌍성총관부 공격에 동참한 결과, 고려는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았고, 이자춘은 당당하게 고려의 공신이 되어 동북면에서 세력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대중대부 사복경'이라는 고위 관직을 하사받고, 고려 중앙 정계에도 진출하게 된다. 개경에 저택까지 하사받는다. 이자춘은 왜구 격퇴에도 공을 세워 '통의대부'와 '정순대부'라는 직책을 하사받고, 천우위 상장군에 임명되며, 승진을 거듭하여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개경에 머물던 이자춘이 동북면으로 돌아가려는데 사실상 봉건 영주처럼 동북면 일대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자춘을 그냥 보내는 건 불안하고, 동북면도 안정시킬 겸 관직을 줘서 보내는게 더 낫다고 여겼는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동북면 일대 통치권을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어사대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민왕의 명에 따라 동북면으로 돌아가던 이자춘은 얼마 안 가 병사했고 이후 그의 아들 이성계가 '통의대부 금오위 상장군'의 중앙 무관직과 '동북면 상만호' 직책을 물려 받는다.

그리고,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전한 아들이, 훗날 역사를 바꾸는 주역이 되었다.

2. 청년 시절

원나라에서 만호장이 되었다가 원나라가 망할 때쯤에 고려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우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5] 아버지인 이자춘과 배다른 형인 이원계와 배다른 동생인 이화와 함께였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고려의 신하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들들에게는 삼촌을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이원계의 둘째 아들인 이천우가 공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다.[7]]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계'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계'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곡[8]이다. 아마도 고려 시기에는 원나라몽골 유목 민족의 풍습으로 여러 부인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호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수도에 소환해서 생활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고향의 아내인 '향처'와 수도의 아내인 '경처'가 따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일에 그런 제도들은 사라진 뒤에 이해 부족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9]

2.1. 왕이 될 꿈

이성계 하면 생각나는 상당히 유명한 일화로, 야사에 따라 내용이 다종다양하다. 왕이 될 꿈을 꾸었고, 서까래 3장을 등에 이고 있었다는 것은 대체로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 보니 등에 서까래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다. 무학대사는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고 설명했다.[10]


좀 더 긴 버전도 있는데, 아래와 같다.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있던 이성계는 나무 위에서 닭이 '꼬끼오' 하고 시끄럽게 우는 것을 보았다.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이성계는 자리에 일어서려 했는데 등에 서까래 세 장이 얹혀져 있었고, 이 서까래는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서까래를 떼어내기 위해 사람을 찾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꽃밭을 보았다. 꽃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꽃은 시들었고,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이 꿈에 대한 해몽을 무학대사가 해주었다고 하는 판본도 있고 동굴에 숨어살던 이름모를 노파가 해주었다는 판본도 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 닭이 '꼬끼오'하고 움 : 꼬끼오를 한자로 음만 옮겨적으면 '고귀위'가 된다. 고귀위(高貴位)는 실제로 있는 단어로 뜻만 해석하면 '높고 귀한 자리'를 의미한다. 이성계가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
  • 서까래 3장 : 임금 왕이 될 것으로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동일하다.
  • 아름다운 꽃이 있으나 시들어버림 : 꽃은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군공과 업적들을 의미하고 꽃이 시들면 열매가 열리므로 이러한 업적들을 바탕으로 결실을 맺을 것을 의미한다.
  • 무언가 깨지는 소리 : 깨지는 소리가 나면 주변 사람들이 그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즉, 만백성이 이성계를 우러러 본다는 의미.

또 다른 일화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갔는데 그 앞에 얼짱거지가 거지 티가 안 날 정도로 옷을 멋지게 입고 와 있었다. 점술가가 한자를 하나 뽑아보라고 하는데 그 거지가 뽑은 한자는 물을 문(問). 점술가가 말하기를 "문(門) 앞에 입(口)이 있으니 당신은 거지 팔자요"라고 하자 그 거지가 "나 참 딱 걸렸네" 하고 투덜대면서 쓸쓸히 퇴장한다. 그 다음 이성계도 한자를 뽑았는데 역시 문(問)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점술가가 놀라서 "이것은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君)이니, 왕이 될 팔자로군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판으로, 이성계가 먼저 파자점 치는 점술가를 찾아가 물을 문(問)을 뽑았더니 점술가가 이성계에게 왕이 될 팔자라고 말해주고 그 다음 날 이성계가 근처에 있던 거지 하나를 멀쩡한 사람처럼 변장시켜서 똑같은 점술가를 찾아가 문(問)을 뽑게 하라고 시켰더니 점술가가 그 거지에게는 거지 팔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별 상관은 없지만 이런 패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높으신 분들보다 점술가의 지적 능력을 띄워주는 목적이 강하다.

또 다른 변주로 이성계 이후에 점을 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이지란이며, 점쟁이의 거지 팔자 선언으로 날뛰는 이지란을(복채도 이성계의 2배나 냈다고 한다) 이성계가 말리면서 둘이 이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 또한 있다.그런데 이지란은 개국공신으로 평생을 그럭저럭 잘먹고 잘사는데 그럼 점괘가 틀린 거네

목자득국(木子得國),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즉 이씨(李)가 왕이 된다는 도참이 전해져서, 고려 왕실에서는 오얏나무(李) 심고 베기를 반복하면서 이씨(李)의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실의 문양을 같은 발음의 이화(梨花) 즉 배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화(李花)이다.

3. 무장 시절

성년이 되어 이자춘이 사망한 후 전주 이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별초'라 불리는 가문 직속의 정예 사병들을 이끌고 요동에서 한반도 남부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에서 꾸준하게 고려군의 장수로 맹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은 가히 척준경과 함께 한반도와 만주를 통틀어 역사상 최강의 돌격형 무장이자 인간공성기로 불릴만한 것이었으며, 특히 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성계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했으며 귀순 후 왕의 호위직인 애마를 맡아서 했다. 공민왕이 보낸 고려군과 내응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침략해오는 몽골, 왜구, 홍건적, 여진족과 반란군들을 물리치면서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최영과 함께 고려의 수호신으로 불렸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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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벌인 전투들. 위로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 아래로는 왜구, 그리고 고려 중앙군까지 당대 동북아의 모든 세력들과 전투를 벌였고 모두 승리했다. 그야말로 고려판 불패신화.

세세한 전공을 제외하고 굵직한 전공만 따져도 다음과 같다.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
  • 같은 해 10만 홍건적의 고려 침공.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가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가별초)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다.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만 군사의 침입을 물리쳤다.
  • 1364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침공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섬멸시켰다.
  • 1364년 1월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반란군이 함주를 함락하자 이를 물리치고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
  • 1370년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함. (제1차 요동정벌)
  • 1377년 우왕 3년 왜구를 지리산에서 격퇴했다.
  • 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격퇴하였다.
  • 1380년 내륙으로 진출한 왜구의 대군을 크게 섬멸했다. 이를 후세엔 황산 대첩이라 부르게 된다. 황산 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1]
  • 1382년 여진족 호바투가 노략질을 할 때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지란과 함께 궤멸시킴.
  •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물리침.
  •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이인임을 유배시킴. 임견미, 염흥방 척살.

이 시기 이성계의 활약을 보면 굉장하다.[12] 고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군벌,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성을 직접 함락시켜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역인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그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그 당시에 상당한 네임드였던 나하추를 우주관광 태워버렸다. 이때 나하추는 장수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붉은 기를 주었는데, 이걸 가지고 나간 장수는 관우 앞의 안량과 문추 꼴이 되었다. 이에 열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올킬. 이는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나하추 부인이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지가 오랜 세월이지만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피하여 속히 돌아오십시오" 하였으나 나하추가 듣지 않았다. 나하추는 병력을 모두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오히려 이성계의 거짓 패퇴에 휩쓸려 '완패'한다. 결국 나하추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좋은 말(馬)을 각각 선물하며 예를 차렸다. 진중에서 이성계의 무공을 본 나하추의 누이는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376년 우왕이 나하추에게 개성부윤 황숙경을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나하추가 말하길 당시 공민왕이 이성계를 보내어 거의 죽을 뻔했다며, 이성계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신(神)과 같다면서 안부를 물으며 이성계는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가별초)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적을 '대파'했다. 이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무신의 재림'이라고 볼수도 있을 정도.
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 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김득배·이방실

1364년에는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와 의주에서 고려군이 패퇴하고 안주로 후퇴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무사로 삼고, 이성계에게도 동북면 기병 천명을 이끌고 가서 최영을 돕게 하였다. 그런데 이귀수,지용수,나세,안우경,이순,우제,박춘과 같은 기라성 같은 고려 장수들이 패전을 거듭하고 와서 전장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들을 무시하며 보란듯이 나선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중앙, 좌, 우군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 군이 맡게 된다. 선봉에 선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리며 이성계 군대가 중앙 돌파에 성공하면서 덕흥군 주력 부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군사들이 흩어진 덕흥군 좌우 군대를 공격하였다. 살아남은 덕흥군 군사는 17기 뿐이였다. 한마디로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엿을 먹어보라는 거였지만 문제는 저런 정신나간 상황에서도 이겼다는 것. 거록대전을 치른 항우의 일화를 연상케하는 대목인데,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도취돼 오만과 포악성에 고삐가 풀려버린 항우와 달리 이후 이성계는 겸손의 미덕을 깨닫게 되고 오만한 행동을 줄이게 된다. 눈앞의 적보다 등 뒤의 아군이 등을 돌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셈.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갓 서른 살(만으로 29세)이었다.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아마 우왕 때의 2차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 물론이고, 실패했어도 비극적으로 장렬히 전사한 희대의 영웅, 명장으로 추앙되었을 명장이었다. 아무튼 살펴볼수록 어마어마한데, 후대에 명장 소리 듣던 신립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이성계의 전공들이 얼마나 사기적인 수준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대단한 이성계도 자기 아들 만큼은 이기지 못했다. 그 아들이 먼치킨이기는 했지만.[13]

3.1. 불세출의 신궁

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정말 무서운점은 그 충격과 공포의 활실력이 야사가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 거기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을 타고 돌격하면서 활을 써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는 것. 궁술에만 한정한다면 사실상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력으로 손꼽히는 항우급의 인간병기로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수준이다.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세운 왕조에서 쓰였으므로 리스펙트 차원의 미화와 과장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감안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계의 활솜씨가 뛰어났다는 설 자체를 허구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일부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활실력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14]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 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

  • 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인간이 쓸 물건이 아니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15]

  • 1차 요동정벌 당시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 70발을 쏴 성벽 위에 있던 고안위의 부하 70명의 머리를 하나씩 쏘아 맞혀 죽였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나머지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을 하였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 이 솜씨는 정말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게, 똑같은 힘으로라면 수성 측에서 쏘는 게 공성측보다 멀리 나가니 보통은 궁시로 수성 측 병력을 저격할 엄두를 낼 수가 없고, 편전 자체가 길이가 짧고 깃이 작아 명중률이 떨어지는데다 쏘는 법을 익히기도 까다로운데 저격용으로 그것도 한발도 빗나가지 않는 헤드샷만 내면서 쓰기까지 했으니.


  •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성계는 투구꼭지를 맞혔으나 투구가 기울어질 뿐 떨어지지 않았고, 아기발도가 다시 쓴 투구를 이성계가 다시 맞혀서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사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히었다는 정자 부위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다 못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인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필시 움직이는 상태였을 상대를 2번 다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건 현대 저격수들도 어려운 일이다.

  • 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히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가 대략 1.2m니, 18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히었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2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
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 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 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어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활을 잘쏘기로 유명한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이성계와 활쏘기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는데, 족히 수백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 때 황상은 50발을 연달아 맞힌 후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하였으나 이성계는 단 한 발도 빗나간 것이 없다고 한다. 게임의 엘프 궁사나 사극의 활쏘기 연기, 올림픽 양궁경기를 주로 접하는 현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점이지만 각궁은 살상 내지 전투용이기 때문에 장력이 굉장히 강하며, 팔과 어깨와 등의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역 양궁 선수도 다루기 어려워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걸 백발을 쏴서 백발을 다 맞혔다? 그 정도의 완력과 지구력과 집중력이면, 이미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그리고 사실 황상의 50발 만으로도 충분히 무지막지하다. 이정도면 달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으로 현대 한국의 국궁체계에서 최고 등급 9단은 45발 중 39발을 맞추는 것이다. 정조도 50발 중 50발을 다 맞힐 수 있는 실력을 지녀[16] 엄청난 명궁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백발을 다 맞춘게 비상식적인 수준인 것.

  • 여진정벌 당시에는 여진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혔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 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족과 싸울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의 기록이지만...그런데 정사에도 있다.

  • 야사에는 활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궁으로 해냈다는 기절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그런데 정사에 실려 있다는 얘기들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다.

기록에 따르면 활솜씨만이 아니라 검술(劍術), 마술(馬術)에도 능했던 듯 하다. 척준경까지는 아니지만 적병 7~8명 정도는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몇군데 있다.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이성계가 화살이 없이 기(氣)만으로 활을 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인식도 대부분 명궁이라고 알고 있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은 신궁. 역시 용장으로 이름난 송의 조광윤처럼 개국군주로서 특히 무예가 뛰어났다.[17]그리고 말년도 조광윤과 유사하다[18]

원래 무골(武骨)이라서 그런지 노인이 되어도 정력이 강건하기 그지 없어서, 60대 중후반 쯤에 딸(숙신옹주)을 하나 낳았다. 또한 훗날 나이가 들어 태상왕 시절 밖에 놀러 나갔다가 만취해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올 때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 타고 갈거니까 당장 말 가져와!"라며 징징댔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태조의 그림(위)을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진 강인한 체격임을 알 수 있다. 창작물에서는 활 쏘는 사람들을 여리여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실전을 위한 활을 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육 단련이 필요한데다가, 위에서 언급하였듯 이성계는 장수들이 놀랄 정도의 강력한 활을 사용하였으므로 저렇게 체격이 다부진게 당연하기는 하다.[19]

3.2. 세력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이것이 원나라 벼슬 그대로 '만호장'이라는 뜻이면, 이성계 휘하에 1만호에 달하는 백성이 식읍과 같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였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다. 그냥 정예 보병 정도도 아니라 이성계의 개인 사병 집단 대부분은 수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또한 이성계는 동북면 - 동만주 지역의 수많은 여진족 세력을 거느린 일대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장에 이성계의 최대 전공 중 하나인 황산대첩에서처럼 여진족 기병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성계 휘하 무장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적접 다스리던 고려인 농부, 평민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 몽골인들이 모두 잡다하게 섞인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정예 사병인 이성계 군단은 전투전에 대라(大螺)를 부는것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고려 내에서 매우 드높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글을 참고하자

이성계의 정예 부대인 가별초는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 시기에 혁파되어 일반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한국사 중에서 이례적으로 조선은 신하들의 동의 없이는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 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21]이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 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글을 참고하자. [단,]

3.3.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틀:고려의 구공신]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 이성계 왕조 멸망
(영의정) 이서

작위 화령군 개국충의백
(和寧郡 開國忠義伯)
공신호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녹권호 중흥공신 녹권(中興功臣 錄券)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선배 무장인 최영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그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23] 하지만 이어진 명나라의 도발에 그야말로 천생 군인답게 우직하게 대처하는 최영 때문에 제2차 요동정벌 떡밥에 휘말리는 처지에 빠졌다.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에 반대했지만, 우왕이 최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에는 이성계의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소문까지 퍼져서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지만 뚜렷한 명분이 없던 차에 요동정벌을 명분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다. 즉 요동정벌을 성공해도 이성계가 명나라에 죄를 짓게 만들고, 실패해도 이성계의 사병 집단을 무력화시킬 기회로 봤다는 것이다. 정사(正史)인 고려사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친분이 두터웠다며 이를 부인하지만 일각에서는 최영이 요동정벌을 계기로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우왕은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좌,우군도통사 휘하에는 도원수, 상원수, 조전원수 등 28명의 원수(元帥)가 각각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즉 원정군은 28원수들이 각각 거느린 부대를 단위 부대로 하고 있었다. 비록 최영이 총지휘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8원수들에게 절대적 통수권이 부여된 상태로 원정군 편성도 원수들 재량에 의해 조정될 수 있었고, 단위 부대 차출도 원수가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공문을 보내 스스로 충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려 중앙군이라고 해도 각 도의 병사들이 원수들에게 사적으로 예속되는 경향이 심해서 사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휘하 원수들도 이화, 이지란과 같이 이성계의 사적 통제를 받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이성계가 거느린 동북면 군사들이 전력도 강하지만 가장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게다가 최영은 우왕이 붙잡아서 가지도 못했으니 사실상 요동정벌 원정군은 이성계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우왕의 명으로 제2차 요동 정벌을 위해 북상하다 칼을 돌려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 최영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랬다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폐가입진)을 하며 우왕과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그리고 최영에 이어 우왕과 창왕도 참살된다.[24]

공양왕 시기에 본거지인 화령군의 백작(伯爵)으로 임명 되었다. 공양왕파였던 정몽주가 공양왕과 결탁하여 이성계 무리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참살되었다.

결국 왕대비 안씨는 공양왕을 폐위,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봉한다. 1392년 7월 17일, 감록국사 이성계는 국새를 받고 수창궁에서 고려의 사직을 자신이 이어받았음을 선포한다.

왕으로 등극한 후 명나라에 '권지고려국사'(권서고려국사)로 외교 문서를 보내 왕이 되었음을 알렸다. 조선은 자주국이긴 했으나 성리학적 명분상 천자국인 명나라로부터 고명[25]을 받지 못하면 외교적으론 '권지국사(권지조선국사)'라 하고 '조선국왕'이라 칭하지 못했다.[26]

명(明) 태조 주원장은 위화도 회군이 아니였으면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자기가 세운 왕조를 지키기 위함인지 역성혁명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지닌 인물이였다. 군주가 천명(天命)을 거스르면 방벌(放伐) 즉 무력으로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를 공자의 정배(亭配)에서 빼버리고 제사도 못지내게 한 인물이다. 형부상서 전당이 이를 반대하다가 화살형을 당하게 됐는데, 전당이 "맹자를 위해 죽으면 영광입니다"하자 감동한 주원장이 살려주고, 맹자의 제사도 회복시켰으나, '맹자'에서 은나라(상나라) 마지막 왕 탕왕(湯王)과 이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에 대한 부분은 빼버린 '맹자절요'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베트남에서 신하가 진씨 왕조를 무너뜨리자 조공도 받지 않고, 주원장 아들인 영락제는 이를 명분으로 베트남을 치러 20만 군대를 보낼 정도였다.

4.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

왕이 된 후의 평가는 업적은 많되 후계를 잘못 세우는 실수를 한 왕. 행정이나 정책적으로는 정도전, 조준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개국을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2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이성계의 정치 스타일은 불도저처럼 유능한 주변 재상들을 자신의 권력으로 팍팍 밀어주는거지 바지사장이나 하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보스 기질도 충분했고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친화력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몽주에 대한 처우도 그렇다. 태종이나 다른 가신들이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말했지만 태조는 정몽주와의 인연으로 신진 사대부에 들어간 것이며 정몽주와 정치를 논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일등이 잦았고 그래서 끝까지 정몽주를 포용하려고 했다. 근데 그 정몽주는 이성계 주변 사람들 죽이려고 했다. 여러 기록이나 태조의 말로 미뤄 보면 정몽주 정도는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정몽주와 태조는 친밀한 관계여서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 또한 자기 주관도 너무나 강한 나머지 한양 천도도 자신의 강력한 입김으로 강행했으며 1년 만에 도성의 공사를 완료했을 정도였다.

장수로서 인기를 얻었던 것과 달리 왕위에 오른 후 이성계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빴는데, 이는 즉위 후 수도 개경이나 지방 곳곳에 산재하던 권문세족같은 중앙귀족들이나 개성 왕씨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인 왕씨 몰살을 벌였기 때문이다.[27] 고려 왕조가 후삼국 시대 말기 신라를 흡수, 병합한 이후 신라의 전 왕실 가문이었던 김씨나 박씨 등을 대대로 우대했던 것과는 대비된다.[28] 특히 고려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는 매우 안 좋은 취급을 받아서[29] 500여년이 지난 구한말까지도 조선과 이성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다는 당대 외국인들이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계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담아 성계탕, 성계육 하며 대놓고 사람도 아닌 짐승에 빗댈 정도.[30]

태조 치세 중에는 3차 요동 정벌이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 명 실록에는 주원장이 "조선의 20만 강군이 요동을 치면 맞설 방법이 없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고 우려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태조는 요동 정벌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요동 정벌을 반대한 조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태조는 1차 요동 정벌에서 요동 공략 중 식량 부족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후퇴하기도 했고 2차 요동 정벌 때도 약소국이 강대국을 공격하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극렬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요동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31]

또 당시 조선도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터이므로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짜로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하려고 했다기보단 사병을 억제하고 중앙 군권을 강화하려 한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당시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 왜구, 여진족 등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말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문제는 주원장이 저 말을 하는 당시에도 한반도 남부는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 주원장 본인의 문서에도 나오지만 주원장 역시 조선을 칠 마음 같은 건 없이 그냥 협박질을 한 것에 불과했으며 당시 일본에도 조선이랑 비슷한 수준의 협박질을 했다가 반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태조 시절 조선과 명의 대립은 양측 다 블러핑 성격이 강했다는 말.

5.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4, 7년 8월 26일 기록 中. 정도전박위가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매핵기 증세를 호소하며.

하지만 말년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1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태조가 이렇게 후계문제를 성급하게 결정하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이성계가 고려로 귀순해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맺은 자녀들의 혼인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맏이 방우지윤#s-1의 딸과 결혼했고 여기에 반이성계파의 거두가 되는 이색[32]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 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33][34]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s-1.1(숙의 지씨, 성빈 지씨)으로 들였다. 3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바로 그 최영[35] 인척 관계에 있다. 4남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5남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둘 다 황려 민씨(여흥 민씨)로 재상지종으로 꼽힌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이인임의 조카인 이제#s-2와 혼인했고 방번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 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36] 이러한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 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 세력과의 혼맥이 없었기에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37]

다만 이 구세력과의 결별설은 어디까지나 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래에서도 다시 검토하겠지만 신의왕후 소생들이 권문세가에게 장가를 들었다면 이방석은 아예 권문세가의 외손이라 딱히 명분 면에서 우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곡산강씨의 원류인 신천강씨 집안은[38] 원 간섭기에 새롭게 일어나 권문세가도 아닌 무려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짜배기 명문가였다.

게다가 바로 위에 나왔듯이 세자의 친위세력으로 이성계가 밀어준 이방번과 이제 역시 구세력 걸고 넘어지면 할 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쪽은 공양왕의 조카사위고 한쪽은 이인임 조카다. 이방석이 설령 처가를 부유 심씨 집안으로 갈아치운들 여전히 구세력과 혼맥으로 얽혀있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유씨에게 누명을 씌워 폐출시키고 이방석의 처가를 갈아줌으로서 구세력과의 결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고작 한 살 차이인 형 방번 역시 그리 할 수 있었다. 누나 경순공주도 마찬가지로 이혼시키고 다른 신흥 신진사대부 집안의 매형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런 목적 설정에 훨씬 부합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움직임은 전무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먼저 태조가 신덕왕후의 첫 아들인 이방번의 세자 책봉을 밀고, 정도전을 포함한 신료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배극렴이 총대메고 나서서 이방번 대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해 일이 마무리된다.[39] 태조의 머릿속에서는 애초에 고려왕실과의 연계성 문제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방번을 세자 후보에서 배제한 표면적 이유가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해서'였던 것을 보면 태조도 이 문제를 지적받고 적잖이 당황했던 정황이 보인다. 만약 보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 하에 이방번을 배제시켰다면 이방우의 사례처럼 보다 그럴듯한 미담을 꾸며 이방석의 책봉 명분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결국 태조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해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북면 촌놈 출신인 이성계가 개경에 자리를 잡고 고려 최고의 권신에 이어 왕 자리까지 오르는데는 경족 처가인 곡산강씨 집안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을수밖에 없으며, 그 곡산강씨 집안은 이성계에게 귀한 딸을 내준것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사촌누이들[40]에게도 연달아 장가를 드는 등 전주이씨 가문의 개경 진출에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을 주었으니 적어도 신덕왕후가 살아있는 한은 차라리 큰왕자들을 숙청하면 숙청했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달라는 신덕왕후, 나아가 곡산강씨 가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석은 태조 자신이 각별히 총애하던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하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 부인들이 신덕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41] 알 수 있듯 신덕왕후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 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쪽이 진실이건, 중요한 것은 태조와 정도전의 생각과 달리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물론 다수의 여론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몽골, 여진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는 큰 아들부터 재산의 일정 지분을 주고 차례로 독립시키고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 재산을 상속 받아 본가의 후계자가 되는 풍습이 있는데.[42] 동북면에서 성장한 태조가 그 지역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태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아들은 막내가 아닌 방번이었고, 배극렴, 정도전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 결정을 바꿨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을 배제한 후, 신덕왕후의 장남인 방번을 먼저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말자상속의 원칙으로 후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43] 더불어 태조는 다시 고려인으로 귀부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에 영향을 받은 풍습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물인데 느닷없이 왕위 계승 문제에 유목민 풍습을 끌어들이는 것은 뜬금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발속에서 1396년 6월 세자 이방석의 생모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뒷배가 부실해졌다. 태조는 세자 이방석의 권위를 위해 일부러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한양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인 현빈으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빈 심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44]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태조도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방과, 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 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45][46]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47]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 정책에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왕실 집안 싸움이 되다보니 병사들도 혼동이 왔고 아우 이화나 조카 조온, 의형제 이지란 등 친위 세력이 되어 줘야 할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되었다. 성품 문제는 있어도 세자의 동복형이니 세자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믿었던 방번은 무슨 심사였는지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해 버렸고 이화의 교란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키려 했던 이제까지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방석을 지킬 방패는 한없이 얇아져 버렸다.[48]

그래도 태조 본인이 워낙에 무력 만렙인데다 병력 지휘에도 익숙했고 또 당시에도 전주 이씨 문중과 동북면 가별초의 최고 대빵이었던 태조의 권위가 막강했기 때문에,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왕자든 종친 나부랭이든 감히 태조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태조의 나이가 많다고 해도 원체 강건한 무골이기 때문에 세자가 보위에 오를 때 까지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타이밍 좋게 태조가 병환으로 인해 며칠간 거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두 아들과 이복 동생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난리는 이성계의 용상을 생지옥으로 만들고 만다.[49]

6. 최후와 건원릉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 <태종실록> 태종 6년(1406년) 4월 4일, 연회 중 태상왕 태조의 발언


아들을 둘이나 보내버리고(이방원도 차마 이방간은 죽이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이성계는 1401년 11월 한양을 탈출하여 소요산으로 행차한다. 함흥이라고도 한다. 함흥차사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여러 사람을 함흥차사로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 활로 쏴서 죽여버려 돌아오지 못하자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였다. 무학대사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이성계가 뜻을 꺾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이지만 정사는 아니며 사실 함흥에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의 활 맞아 죽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인물중 송유나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휩쓸려서 죽었고, 성석린은 애초에 함흥에 간 적이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없는데, 반대로 차사로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은 무학대사 제외하고도 많다. 애초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사람이 엄청나고, 이중 반란에 휩쓸린 사람 제외하고는 다 살아왔다.

다음해인 1402년 이성계의 묵인 하에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 주동자는 이성계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미 기반을 갖출 만큼 갖춘 상태였으므로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게 되며[50], 그 뒤 절이나 온천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풍질(뇌졸중)에 걸려 앓다가 결국 1408년 음력 5월 24일 파루시간[51] 얼마 뒤에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이다.[52]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아버지에게 올렸지만 이성계의 기력이 다했는지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왕(태종)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이성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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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53] 이후 역대 조선 국왕들의 왕릉 봉분이 잘 정돈된 것에 비해 태조의 건원릉은 억새풀이 무성하여 매우 투박한데, 어떻게 보면 무덤 주인 이성계와 잘 부합한다. 건원릉의 상징이 되면서 억새풀 벌초는 1년에 딱 한 차례만 한다. 동구릉에 가면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태조 이성계의 왕릉이니만큼 야사도 존재한다. 야사 내용들을 보면 태조가 내가 죽으면 고향 함흥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아들이자 3대 임금인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함흥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고 제사도 힘들다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불효를 저지르게 되니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부터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를 그리워하여 신덕왕후의 묘가 있는 정릉에 합장되기를 원했으나 생전 신덕왕후와 사이가 나빴던 태종은 차마 그 말을 따를 수 없이 새로운 묏자리를 알아봤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죄책감에 평소 향수병이 있던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자라나는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심었다는 내용 이렇게 존재한다. 사실 조선에서 왕릉은 왕이 궁궐에서 하루만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서 조성할 수 없으니 즉 왕은 궁궐을 비울 수가 없다. 그래서 왕릉이 아무리 멀어도 경기도 권역에 존재한다. 일단 어느 쪽 내용이던 한양(지금의 서울)과 함흥은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니 그냥 파서 가져오면 가져오는 시간동안 억새가 말라 죽으니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한양에서 함흥까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 릴레이 형식으로 억새를 운반해 건원릉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야사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왜군은 건원릉에 불을 질렀으나 정자각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해 불이 꺼지자 왜군이 몇 차례나 재방화를 펼쳤음에도 계속 실패하여 결국 방화를 단념했다는 야사를 비롯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진다.

[틀:문서 가져옴]

[1]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한다.[2] 하지만 주민들이 지도자를 따라서 거처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상식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3] 사실 왕조가 원에 반(半)복속되고 충렬왕 자신도 원에 뭐라 끽소리 못하는 상황에서 원에 항복한 고려인에 대해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4] 몽골식 이름. 고려식 이름으로는 이자흥(李子興).[5] 사실 이들의 행보는 좋게 말하면 세상과 사회 현실을 보는 눈이 밝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인 거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자신의 가문을 키우는 염원이 매우 간절했을 것이다.[6] 고려의 혼인제도는 초기에도 일부일처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 만큼왕실은 일반적인 것에서 대체로 예외로 취급되며 왕비가 여럿이 동시에 존재하던 것도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다. 당장에 일부다처를 주장했던 고위관리가 개경 시내에서 부녀자들에게 조롱받았다라는 기록도 있는 만큼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7] 이런 이유는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둘 다 "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부인은 첩이 아닌 정실이다.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다첩이 된 건 조선 태종조 부터이다.[6[8] 이방원이 벌인 짓이다.[9] '향처'는 사실 원래부터 혼례를 한 경우이고, '경처'는 뒤에 지방출신자들이 개경에 진출하면서 가문의 위격과 관련되어서 혼례를 한 경우이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다고 생각되지만. 생각해보면 '향처'가 혼례시기가 더 빠르기에 윗 서열이라고 봐야한다.그러나 이성계가 개국 이전 사망한 향처를 사실상 박대하면서 향처 자녀들의 불만을 불러왔다.[10] 혹은 더 노골적으로 무너지려는 집에서 상태가 뛰어나 몹시 탐이 나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꿨다는 버전도 있다. 같은 원리로 이쪽도 임금 왕(王)자가 된다.[11] 기록을 보면 그 이성계도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길만큼 치열했다.(교전 중 한 왜구 장수가 이성계의 배후에 접근해 공격을 시도함에도 눈치를 채지 못할만큼 정신이 없어서 의형제이자 심복 이지란이 그를 두 번이나 부르며 알려줬으나 깨닫지 못하자 직접 활을 쏴서 구해줬다.)[12] 보통 동아시아권의 창업군주의 경우 유학의 도입 이래로는 국가를 세운 과정에서의 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에 배치되는 군사적인 업적은 축소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당의 고조당 고조 이연은 집안이 北周정권에서 군사권을 나눠가진 곳이기에 그렇지 무장으로써의 능력을 보여준적.... 이렇게 따지면 수 문제 양견도 무장출신이어야 한다. 심지어 양견은 北周에서 장군직까지 받은 사람이다.나 송 태조가 대표적인 경우. 비슷한 경우로, (촉한이 통일왕조도 아닌데다가 얼마 못 가서 당고조 및 송태조와 병칭하기에는 어색하지만) 삼국지의 유비도 실제 역사에 비해 연의에서는 유교적 의미의 덕이 강조되면서 일신의 무력이나 지휘력 등 군사적 능력이 묻혔다. 삼국지연의/피해자 참조.[13] 아들 태종은 비록 뛰어난 인물이긴 했지만 군적에 몸을 두었던 적은 없었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상황을 먼저 이겨놓고 싸우기 시작하니 질래야 질 수가 없었다.[14] 참고로, 주몽 신화의 주몽이 화살 한 발을 쏘아 비둘기 2마리를 맞혔다.[15] 창작물에서 활을 쓰는 인물들은 호리호리하게 묘사되다 보니 힘은 그다지 필요 없고 명중실력과 같은 테크닉으로 활용하는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게임 등에서도 궁수, 투창(자벨린 등) 원거리 공격 캐릭터에게는 힘(Strength)은 최소한의 요건이고 민첩성(Dexterity)가 훨씬 중요하다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화약을 이용하는 총과 달리 활은 화살이 날아갈 힘을 순수히 궁사로부터 내야하기 때문에 강한 활은 궁수의 근력과 실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강력한 궁사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려면 그에 걸맞는 튼튼하고 강력한 활이 필요한데, 그런 활은 "사용하는데 무지막지한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연습 혹은 놀이용 활보다 군사용 활은 몇 배나 더 많은 장력을 지녔다고 한다.[16] 그런데 겸손을 위해 일부러 한발씩은 빗맞혔다.[17] 조광윤은 창술로 유명했고 그가 만들었다는 송가창법은 중국에서도 대표적인 창술 중 하나이다.[18] 송태조 조광윤은 뒤를 이은 송태종 조광의에게 죽었다는 의혹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조광윤 문서 참조[19] 실제로 아들인, 훗날 정종이 되는 이방과 역시 뛰어난 무인이었고, 조선 왕들 중 체격이 좋고 신체능력이 좋은 이들이 유독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 강건한 신체는 이성계 집안의 내력일 가능성이 높다.[20] 고려가 원간섭시기가 되면서 사실상 중앙의 여러 조직들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에 고려 후기에 조정은 사실상 원의 군대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데, 공민왕이 각 지방의 토지와 사람들을 지배하던 토호들을 왕이 가지는 권위로써 복종시켜 국가체계를 다시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사망하면서 고려의 군사권은 소수의 근위부대 출신에 군원로 최영과 각 지방 토호들이 연합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동북면일대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국가의 명령으로 배속된 토호의 사병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다.[21] 성종이 이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변명한 기록도 있다.[단,] 중간에 나오는 여진족 부족 지도는 링크된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하지만 모두 이성계에게 완전히 복종한 부족들은 아니며, 지도에 나타난 지역이 모두 이성계의 땅인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 크든 작든 일단 미치기는 하는 지역을 뭉뚱그려서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지도를 잘못 해석하면 마치 이성계가 현대의 간도 북부와 연해주 지역 일부까지 지배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다만 공민왕시기 이자춘-이성계 부자의 투항과 함께 개마고원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이 확대되었고, 태조시기에 두만강까지는 조선의 경계로 두고 있었다가 태종시기 경성까지 밀렸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법 넓은 지역을 이성계가 커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23]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속셈이 가득하다며 없애라고 경고했지만 이간질로 여긴 최영은 듣지 않았다. 훗날 위화도 회군이 벌어진 뒤 최영은 "그때 이인임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스럽다."라고 탄식한다.[24] 우왕과 창왕이 가짜라는 것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 스스로 왕이 되는 역성 혁명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 500년 동안 우왕창왕은 당연하게 신돈의 아들 취급 당했고, 의문을 가진 선비도 간혹 있었지만 나라와 왕가 정당성의 뿌리를 흔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상 본격적으로 억울설을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세가가 아닌 열전, 그것도 반역전에 신우, 신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진 현대에 들어서는 어느 쪽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정황상 군사 정변의 부족한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모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용의 눈물 등 여말 선초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왕씨 겨드랑이의 용의 비늘 야사를 통해 사실 우왕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희생된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다.[25] 왕위의 사후 추인[26] 명분상 조선은 명의 제후국이니 그렇다.[27] 아예 왕씨의 사용 자체를 금했다. 사성된 경우는 본성으로 되돌렸고, 고려 왕실과 관계없는 왕씨라도 모친 쪽의 성씨를 쓰도록 했다. 다만 왕실과 관계없는 왕씨를 개성 왕씨라고 무고한 일에 대한 기록도 실록에 있으니 억울하게 죽은 이들 또한 있었을 수도 있다.[28] 다만 조선도 초기에만 탄압했지 나중에는 탄압을 중지하고 왕씨들을 복권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문종 때였고 이미 죽일 사람은 다 죽이고 철저히 몰락시킨 다음이었으니 별 큰 의미는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한국에서 김씨나 박씨, 이씨와 왕씨의 위상 차이는 비교도 안 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유명한 여성 배우 전지현은 본명이나 집안 가문이 왕씨라고 화교중국인 취급을 받았을 정도였다.[29] 물론 조선 시대 내내 왕들의 중시조였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 디스했다.[30] 사실 이런 요리로 저주하는 전통은 백기(전국시대)가 원조다. 장평대전에서 30만 조나라 포로를 파묻어죽인 원한으로 지금도 산시 요리 중에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라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 혹은 바이치러우(백기육)라는 음식이 있다. 물론 백기의 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부 요리다.[31] 나라가 어지간히 막장이 아니라면 온건파는 정작 군인 출신들인 경우가 많다. 콜린 파월이라든지 제임스 매티스라든지. 전쟁을 직접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오히려 매파에 전쟁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들이 많고. 이성계도 온갖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전쟁에 회의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군이 좀 정신나간 집단이었던 셈.[32] 이색은 고려 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33]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다고 나오며,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정식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받으면서도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34]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35] 위화도 회군으로 제거된 이성계의 최대 정적[36]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37]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 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s-1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38] 곡산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 강윤성 대에 신천강씨에서 분관되어 지금은 다시 신천강씨에 합관되었다.[39] 그 배극렴도 처음에는 신덕왕후 소생의 책봉을 반대하다가 데꿀멍하고 전향하게 된다. 실록에서는 배극렴을 무식한 무장이라 태조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우디르해버리는 위인이라고 까는데, 무인정사 이전까지 실록에서 세자책봉 문제로 직접 욕을 들어먹는 것은 그가 유일하다. 그런데 정작 이방원은 그에 대해 딱히 어떠한 보복을 가하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이라도 부관참시니 시호박탈이니 보복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도.[40]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흥의 딸들.[41]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42] 이는 목초지 고갈 문제 때문에 항상 새로운 초지로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장성한 아들들은 빨리빨리 독립시켜 스스로 새로운 지역에서 목초지를 개척하면서 살도록 하는 생존 전략이다.[43] 그러나 방번이 누구의 사위인지 생각하면 처음에 방번을 고려했다는 기록 자체가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실록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왜곡과 짜깁기가 심한 사료다. 조선 전기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지 않아 선택지가 없어서 선뜻 다른 의견 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44]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처박은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을 한 것이다.[45]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46]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이는 곧 방우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장자 이복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47]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48]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화나 이지란 등은 아무리 방석을 지켜줘봐야 좋은 일만 해주는 것이 명백했으니 이방원이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정씨의 나라입니까?"하고 설득하면 당연히 넘어갈 수밖에 없고 방번은 자기 자리를 방석이 빼앗아갔다고 생각할 것이 뻔한데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된다.[49] 병환설은 조작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리 타고난 무골에 강건한 사람이라도 나이가 6~70대 사이의 노인인데 건강 관리를 잘 했어도 감기 같은 잔병에라도 걸려 누웠을 확률이 높다. 태조가 멀쩡하다면 아무리 명분을 내세웠어도 엄연히 왕과 국가에 반역을 일으킨거다. 그리고 이렇게 반기를 들면 오히려 태조는 그렇지 않아도 그냥 놔두기 찜찜하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정리할 명분이 생긴다. 1차 왕자의 난은 감정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여 벌인 일인데 태조의 상태도 제대로 안 살피고 그냥 대뜸 들이닥쳤을 리는 없다.[50] 두 사람이 뒤늦게나마 화해한 건 물론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성계는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 했는데 그 꼴을 본 사람들은 그가 왕씨들을 잔혹하게 다뤘기에 자기 아들들의 죽음으로 천벌을 받은 거라고 여겨 동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도 이 때문에 왕씨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나 함흥으로 쫓겨나게 되자 사람들은 이성계를 동정하고 이방원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버지를 외면했던 이방원은 뒤늦게나마 화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성계 입장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후계자가 없었다. 아들들 대부분이 죽거나 유배되거나 무능력자로 판명난 상황에서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이미 용상에 앉은 다섯째 아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왕권을 튼튼히 다져 놓으며 흔들리던 왕조를 안정시킨 일등 공신이었으니, 자신의 분노만으로 아들과의 화해를 끝내 거부한다면 결국 나라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더 큰 대의를 위해 화해를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51] 5경3점 시간에 통행금지를 알리던 종소리 시간으로 현대시간으로 대략 새벽4시[52] 고려를 위해 함께 해왔던 정몽주와 자신의 원훈인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까지 참살한 나쁜 놈이자 동시에 자신의 왕조 창건을 도운 일등 공신이자 명군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은 애증이 교차했을 아들인 태종 이방원. 부자가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태종의 젊은 시절 태종은 무관에 대한 멸시가 저변에 깔린 고려에서 무관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고려 정계에서 활동하며 문관들과 교류해 이성계의 정계 진출에 도움을 줬다. 오죽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내가 손님과 즐겁게 보낼 수 있던 건 네 덕분이다."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53] 동구릉에는 태조의 왕릉 건원릉을 비롯해 다른 임금들 및 왕후들이 묻혀있다. 동구릉이라는 뜻 자체가 동쪽에 있는 아홉 능이라는 뜻. 동구릉은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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