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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다른 뜻1]



목차

1. 개요
1.1. 명칭
2. 역사
2.1. 기계식 TV
2.2. 전자식 TV (브라운관)
2.2.1. 컬러 TV
2.2.1.1. 외국의 상황
2.2.1.2. 한국의 상황
2.3. 컬러 TV 보급 이후~1990년대
2.4. 2000년대
2.5. 2010년대
2.6. 2020년대
3. 종류/규격
3.1. 디지털 방송
3.1.1. ATSC
3.1.2. DVB
3.1.3. ISDB
3.1.4. DTMB
3.2. 아날로그 방송
3.2.1. NTSC
3.2.1.1. NTSC-J
3.2.2. PAL
4. 매체에서의 텔레비전
5. 기타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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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파신호를 받아 그것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자기기. Television이란 명칭은 '원격의', '멀리 떨어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접두사 'tele-'[1]와 '시야', '화상'을 뜻하는 'vision'의 합성어다. 줄여서 흔히 TV라고도 한다.

1.1. 명칭

한국어 텔레비전, 테레비[2], 티비, 티브이, TV 중국어 电视
일본어 テレビジョン, テレビ 영어 Television, TV, telly[3] 프랑스어 Télévision
스페인어 Televisión 독일어 Fernsehgerät, Fernseher 포르투갈어 Televisor, Televisão
이탈리아어 Televisione 스웨덴어 Television 라틴어 Televisio
에스페란토 Televido 러시아어 телеви́дение, телеви́зор 태국어 โทรทัศน์

2. 역사

2.1. 기계식 TV

TV의 시작은 셀레늄이 광전효과, 즉 빛을 받으면 전기가 흐르는 효과를 아일랜드의 전신기사 조지프 메이가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셀레늄판을 이용 빛을 셀리늄판에 투과시켜 빛을 전자신호로 바꾸고 역으로 과정을 거처서 빛을 발산하여 화면을 보이게 하는 기술을 알렉산더 베인이 개발하였으나 이것은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으로만 동작했기 때문에 단일사진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독일의 전기기술자 파울 고틀리프 닙코라는 사람이 닙코 디스크라는 것을 개발하였는데 디스크에 24개의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고 각 부분을 영화처럼 전기 신호를 한 프레임씩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화필름을 세로로 24조각으로 나눈후 각 조각마다 순서대로 빛을 보내는 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세로 24픽셀 이후 영국의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가 텔레바이저(televisor)라는 이름으로 상용화하였고[4]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이 표현을 사용하여 телевизор(텔레비조르)라 부르며 독일어는 저 텔레바이저를 개념적으로 번역하여 페른제엔(Fernsehen, 멀리 있는 것(fern)+보다(sehen))이라고 부른다.[5] 1929년 BBC에서 최초로 기계식 TV방송이 시작되었다.

2.2. 전자식 TV (브라운관)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1897년에 전자를 쏘아서 형광 물질을 때리게끔 하여 형상을 나타내게 하는 브라운관을 발명한다. 그 후 1926년, 일본의 다카야나기 겐지로가 세계 최초로 전자식 기법이 적용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발명하고 미국필로 판스워스1927년에 완전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개발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화면이 볼록한 TV가 등장하였다. 이후 1936년 BBC를 시작으로 방송국들이 브라운관용 TV 방송을 선택하면서 기계식 TV는 3년 뒤인 1939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2015년 샤프전자 및 인도 업체들을 마지막으로 브라운관 TV 생산은 중단되었다.##

아날로그 TV 방송 중단으로 인해 방송 시청용으로는 못 쓰게된 브라운관(아날로그) TV는 그 이후 KODI와 라즈베리 파이 조합을 이용해 스마트 TV로 개조되거나 레트로 게임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되고 있다.일본에서는 흑백 TV을 패미컴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하고 있다.

2.2.1. 컬러 TV

텔레비전을 컬러로 방송한다는 아이디어는 19세기부터 존재했었지만 본격적인 컬러방송을 시도한 것은 1950년 4월 미국 CBS에서 '필드 연속 컬러 시스템(Field-sequential color system)'이란 방식을 선보인 것이 최초이다.

이 방식은 브라운관과 유리막 사이로 3원색이 칠해진 원판을 모터로 돌려서 컬러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당연히 전용 촬상관이 있는 카메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저 색원판을 돌린다고 컬러화면이 되는 게 아니란 소리. 그래서 구조가 복잡하고 소음이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심했으며[6] 실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수상기가 필요 이상으로 비싸져 상업적으로 실패한 데다 하필이면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서 사장되었다. 전시상황으로 주파수 자원을 통제하기에 컬러 따위보단 보편적인 라디오와 흑백 정도만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4년 1월 1일 우리가 아는 NTSC 방식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TV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북미권과 한국, 일본의 방송 시스템으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1960년 9월 10일에 NTSC 방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컬러방송을 시작한다. 1974년에 네덜란드 필립스가 예열없는 '순간수상방식'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NTSC가 본래 원본과 색상 왜곡에다가 나라별로 조명이 다르듯 커스텀도 있고 채도와 색상 등이 다르고 노이즈가 타는데 CBS의 방식처럼 대역을 뺏기고도 기존 전파자원뿐이라 음성신호를 컬러신호에 눌러담는 식이어서이다. 고급영상단자가 아니라 단순 RCA만으로도 안테나 수신과 다른 것도 그 때문.[7]

역시나 NTSC 음성신호는 FM과 동일한 규격이고 일부 대역은 국가나 수신기에 따라 라디오에서 TV 방송이 그대로 청취도 가능하다. 이것도 자원을 아끼며 호환성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날로그 TV는 6번과 7번사이(국내기준이라 살짝 판이하지만)가 보호대역삼아 그 틈에 들어간 것이라서 FM대역이 연속성은 살짝 멀지만 동일한 라디오 방송규격이고 수신기기가 살짝 걸려야만 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2.2.1.1. 외국의 상황
그리고 의외로 쿠바에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일찍 시작했는데 1959년에 아바나 등 일부 지역에서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 때의 컬러방송은 시험방송에 가까웠던 형태였기에(미국만 봐도 컬러TV가 대중화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쿠바 혁명 이후로는 NTSC 방식의 컬러방송은 종료되었고 1976년에 PAL 방식으로 컬러방송이 재개될 때까지 쿠바인들은 흑백으로 TV를 봐야 했다.

다만 쿠바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체제하에 있어서 컬러방송의 명맥이 이어졌더라도 즉각 보편화되는 것은 어려웠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일찍 컬러방송을 시작한 미국과 일본에서도 컬러TV 완전 대중화에 15년이 걸렸고, 당대 쿠바의 빈부격차가 몹시 커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빈민들과 돈이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는 부유층이 공존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서민에게 컬러TV 보급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로 흘러갔어도 실제보다 고작 몇년 정도 더 앞당겨졌을 수준이라는 것이 대다수 평가이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의 베네수엘라에서도 재현된다. 1960년대 말에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갑자기 컬러방송의 송출이 종료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베네수엘라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 시기와 더불어 역대 최고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었기에 왜 컬러방송이 종료되었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컬러TV가 베네수엘라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해야 하는 사치재라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당시 대통령인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흑백TV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챙겨서라는 이유도 있다.

일본과 쿠바에 이어 주요 강대국인 소련, 영국, 프랑스(1967년 ORTF 제2텔레비전(지금의 France 2)에서 개시), 서독 등이 각각 PAL과 SÉCAM방식으로 컬러TV 방송을 개시하여 전 세계적으로 컬러 텔레비전의 수요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나라들이 처음부터 올컬러로 방송을 개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1950년대에 컬러방송을 시작했지만 1950년대 당시에 컬러TV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서 부유층들이나 가지는 것이었고 송출지역도 상당히 제한적이라서 컬러방송 초기 10년간은 흑백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고 컬러 프로그램은 적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로 이 시기 즈음해서 컬러 텔레비전의 생산량이 크게 늘고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으로까지 떨어졌으며 컬러 프로그램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1960년이 되어서야 컬러 텔레비전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프로그램과 광고들을 여전히 흑백으로 방송했었고 컬러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1~2편 정도 따로 편성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방영된 컬러 프로그램들을 보면 화면 밑에 '컬러방송'이란 식으로 자막이 떴었거나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컬러로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떴다.

옛 일본을 배경으로 한 매체를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에서도 컬러TV는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단 걸 알 수 있다. 일본의 1960년대 초반에는 컬러TV 1대가 수십 년치 봉급 수준인 데다가(당시 일본 공무원 초봉이 월 1만 엔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컬러TV 가격은 54만 엔.) 기껏 컬러TV를 사와도 컬러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아서 그다지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해 부자집에서나 가졌던 물건이었고 1960년대 중반에 도쿄올림픽 등의 영향으로 컬러TV가 좀 늘어나긴 했지만 (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월 초봉은 2만 엔 수준이었고 컬러TV가격은 20만 엔 정도의 수준) 대부분의 가정집에서 컬러TV는 꿈도 못꾸고 흑백TV로 만족해야하며 컬러TV는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나 조금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번화가나 기차역, 백화점에서 컬러TV 홍보 목적으로 텔레비전을 설치하는 일은 있었지만 컬러TV를 사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1년치 봉급... 체감으로 매칭하면 PDP의 초기가격이나, 버블경제기 일본 전자업체가 졸부도 안 사는 기기를 만든 거 생각하면 된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 전면 컬러화가 이루어지고[8] 일반 가정집 소득이 컬러TV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가면서 대중화되었다. 여기엔 불편한 진실도 좀 숨어있다. 당시 일본 가전업체들이 카르텔을 결성하고 일본 국내에서 컬러TV를 비싸게 팔면서 미국으로 수출할 때는 반값에 떨이로 판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유럽권에서도 방송 전체가 컬러화된 건 1970년대 초중반부터이다. 프랑스의 경우 제1텔레비전이 1974년 TF1로 분리 독립한 뒤에도 1976년 1월까지 흑백으로 방송했었다. 당시 프랑스의 경우 흑백방송이 819주사선, 컬러방송이 615주사선으로 흑백이 화질면에서는 좋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한다. 이때는 어느정도 텔레비전 기술이 발전되어가던 때였기 때문에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컬러TV가 널리 보급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흑백TV에 비해서 몇 배나 비쌌던 데다가 1970년대 후반의 경기침체로 인해서 컬러TV의 보급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북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 말까지도 뉴스 프로그램은 흑백으로 내보냈으며 교육방송의 경우 어린이들이 컬러 영상을 보면 모방심리를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해서인지 1980년대 초까지도 흑백으로 방송하는 비중이 높았다.

2.2.1.2. 한국의 상황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950년대 초, 중반 외국에서 수입으로 들어온 흑백 텔레비전이 시초이고, 텔레비전 방송이 1956년 5월 12일 대한방송에서 시작되었으며, 미군 PX를 통해서 흑백 텔레비전이 상당수 도입되었다. 검정 고무신을 봤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최초의 국산TV는 금성사 VD-191이다. 19인치짜리 진공관 흑백 TV로 1966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1968년까지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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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국산 TV인 VD-191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과 1960년대 초중반에는 서울과 수도권 등 일부지역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던 데다, 전부 수입품 밖에 없었고 심지어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관세도 높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때문에 부유층의 전유물이 된 덕분에 보급률은 상당히 낮았다. 국산TV의 생산이 시작되어 상대적인 가격이 내려간 1960년대 후반 기준으로도 일제 TV가 10만 원, 미국산이 13만 원, 위에 금성TV가 7만 원 정도로 당시 서울 집값이 평당 5~10만 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전기가 깔려있지 않는 마을도 가끔가다 있었고 가시청 지역이 확대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방 곳곳에 난시청 지역이 많아 기껏 TV를 얻는다해도 보지 못해서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몆 집에만 있었고, 서민층들에게 텔레비전이란 말 그대로 그림의 떡같은 존재였다. 물론 텔레비전이 비싸다보니 도둑맞기 쉬운 물품이었던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한일전이나 인기 드라마 같은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한두 군데 있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몰려들어서 방송을 보기도 했고, 당대 대다수 만화방이나 다방, 일부 구멍가게에서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한 다음에 만화책을 단골로 보는 애들이나 푼돈을 낸 청소년, 커피를 단골로 마시는 고객들을 상대로 TV를 볼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영업했다고 하며 수입도 제법 짭짤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레슬링이나 권투 세계타이틀전, 한일전같이 인기 스포츠 중계라도 있는 날에는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원성도 자자했고, 간혹가다가 실랑이가 벌어지는 등 웃지 못할 일들도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당시 TV가 있으면 동네에서 엄청나게 떵떵거리는 것이 당연해서 TV가 있는 집안 아이에게 각종 아부를 떨면서 TV를 보려고 애썼던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어서 TV가 있는 집 주인에게 성격이 어떻건 간에 아부떨기 바빴다는 후문이 전해져내려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화방이나 다방, 구멍가게나 전파상 같은곳에서 돈내고 봐야했으니까. 그래서 한동안 TV가 있는 집들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시골 같은 곳에서 이 풍경은 1970년대 들어 가정에서의 TV 보급과 '아동도서 정화대책'을 계기로 없어지는 듯하다가 1980년대에 VTR의 보급으로 인해 비디오를 상영할 목적으로 만화방에 TV가 재등장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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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 첨단 기술이 들어간 삼성 이코노 TV[9]

이후 1970년대 들어 TV가 보급된다. 당시 정부에서 뉴스 시사 전달 목적으로 TV의 물품세를 면제해주고 일명 새마을 TV라고 불린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게 공급하는 방식으로[10] TV 보급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TBC의 전국 방송화가 진행되지 않아서 수도권과 PK지역에서만 방송되거나 DBS 동아방송의 TV방송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1975년 이전까진 진공관/트랜지스터 방식이라 TV 한번 켤 때마다 전자총이 예열되기까지 몇 초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전기세만 먹으며 수명도 줄어들기도 했다. 게다가 튜너 접점부분이 은으로 되어 있어 일정 횟수를 돌리면 닳고, 연탄가스와 먼지 등에도 취약했다.

이를 해결코자 1972년에 금성사가 먼저 진공관을 버리고 트랜지스터로 채워 TV 수상시간을 1초로 단축시켰고, 1974년에 IC와 트랜지스터를 결합한 'IC-TR 회로'와 함께 '소프트화면 브라운관'을 개발해내 종전의 자극적인 화면을 부드럽고 선명하게 바꾸어 시력을 보호하게끔 만들었다. 1975년에 삼성전관은 예열 없는 순간수상방식 '이코노 브라운관'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11] 삼성전자가 만든 '이코노TV'에 적용시켰고, 금성은 튜너 접점부분을 순금 99.99%로 바꾸어 마모율을 줄인 '황금회로'를 개발했다.

1976년에 대한전선은 스네이크 현상[12], 스팟 현상[13], 에미션 현상[14] 등을 배제해 '무결점'을 강조한 '디제로 TV'를 개발했고, 금성은 녹색 형광막을 검정 글래스로 감싸 시력을 보호하는 '블랙그린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뒤이어 1977년에 금성은 브라운관 핀트적중률을 높여 화질을 선명하게 하는 'GG전자총'도 개발했다. 이렇듯 1970년대 TV 경쟁은 가히 기술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디자인에서 약간 현지화가 이루어졌는데 한국의 좌식생활에 맞게 다리가 짧아지고 연탄가스를 맞지 않도록 화면을 가리는 미닫이문과 자물쇠가 채워진 형태, 즉 보통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흑백티비의 형태로 바뀌게된다.

한편, 컬러 텔레비전 도입과 관련해서 일종의 흑역사가 있는데 1974년 한국나쇼날전기(현 아남전자[15])가 컬러TV를 처음 생산하기 시작하고, 1975년에 삼성전자가 토종 기업 중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했다. 방송사들(그래봐야 KBS, MBC, TBC뿐이었지만)도 이미 1960년대 말즈음부터 컬러방송 실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 와서는 컬러방송 송출용 장비를 전부 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계만 컬러이지 방송국에서 컬러방송 송출을 100% 하지를 않아서[16] 컬러 텔레비전을 사 봐야 컬러방송을 볼 수 없고 흑백방송만 주야장천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로 흑백이건 뭐건 삼색 셀로판지를 브라운관에 이어붙여 컬러처럼 보이려고 용을 썼다.

대신 1976년부터 AFKN은 컬러로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AFKN이 컬러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주한미군 초병들이 한국으로 올 때 아직도 TV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후진국(...)에 왔다며 문화적 충격을 느껴서라고 한다. 천조국 앞에서는 너도나도 후진국

당시 부산직할시울산시 등 영남 해안가 지방에선 일본방송의 전파가 잡혀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컬러로 나오고 있는 일본 TV방송을 볼 수 있었다. 단, 양국의 TV채널이 겹쳤기 때문에 일부 채널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컬러화면을 즐기기 위해 일제 VCR(U-MATIC이나 베타맥스 등)을 같이 들여놓기도 했다 카더라.

1970년대에 준비가 된 상황에서도 방송국이 컬러방송 100% 송출을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박정희와 신문사들의 반발이었다. 수출과 관련된 기업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어주었음에도 "전기 부족 문제"와 "계층 간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컬러 TV 방영은 물론 내수판매 자체를 하지 않은 정책 탓. 실제로 이 시기 농촌에도 흑백 TV가 집집마다 보급된 터라 이때 컬러 TV를 보급하면 도농격차가 생길 지 모른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그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있던 게,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프로스포츠는 프로복싱이었는데 대부분의 국가에서 컬러방영을 할 시기라서 국제대회 같은 경우 당연히 양 선수가 파란 트렁크, 빨간 트렁크를 입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걸 흑백TV로 중계하면 둘 다 같거나 비슷한 색으로 보여서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아나운서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물론 한국 선수가 경기하는 경우는 흑백TV 사용자를 배려, 트렁크에 흰색 띠를 부착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흑백에서도 트렁크 색상이 구분되도록 했다.

특히 1975년 10월 8일에 박정희는 한국전자박람회 개막식에서 가전업체 사장들 앞에서 "컬러TV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못을 박았으며 신문사들 역시 광고시장을 컬러TV에 빼앗긴다는 우려를 내세워 거세게 반발하였다.

실제로는 유신정권의 여느 정책들이 그렇듯 풍기문란과 '퇴폐문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서구권과 일본에서 컬러TV가 막 보급되던 당시에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문화가 같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당시 미국 내 민권운동도 이 컬러TV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17]

또 박정희는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으로 제2차 오일 쇼크가 터질 때도 똑같은 이유로 계속 지연시켰고, 관세청은 그해 6월 1일부터 상공부의 요청에 따라 외제 컬러TV 및 VCR 반입까지 금지시켰다.[18]

관제 뉴스영화 대한뉴스의 경우에는 1973년부터 컬러 필름으로 상영이 되었지만, 당시 방송 쪽은 거의 안습일 정도로 시험방송에 가깝게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컬러 방송 제작은 이미 컬러방송 중인 외국에도 중계되는 국제적 이벤트에 한정되었다. 예를 들면 1974년 당시 국내에 존재하던 1천여 대의 TV를 통해 미국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의 김포공항 도착 광경과 한국을 떠나는 모습이 컬러로 방영된 바 있었다. 또 1975년 9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축구 정기전 중계방송 당시 KBS가 일본 NHK로부터 요청을 받아 그 경기를 컬러로 중계했는데 당시 국내에 있던 컬러 TV 수상기로도 방영된 바 있었다.


1977년 12월 31일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 MBC 10대가수 가요제. 제작 단계에서는 흑백과 컬러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하순에 미국 백악관 특별통상대표부가 한국 정부에 국내에서 팔지 않는 컬러TV를 남의 나라에 수출한다는 것이 국제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당시 컬러TV 수출 물량은 1977년 12만 대, 1978년 50만 대였는데, 대다수가 미국 시장에 팔렸던 것이다. 미국 측의 시비는 1979년부터 노골화되어 미국 측은 한국산 컬러TV 수상기 수입물량을 연 30만 대로 규제해 버리면서 수출길이 가로막히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 4월 8일에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수출을 하지 못한 컬러TV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화를 낸 나머지 대만 방문 후 삼보전자를 찾아가 15일 저녁에 수행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귀국시 컬러TV 방영을 허락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시도한다고 선언하여 다음 날 국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지만, 박정희의 컬러TV 불가론을 이어받은 최규하 대통령의 고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전두환국보위가 정권을 잡은 뒤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1927~2017)는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금진호로부터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컬러방송을 건의해보겠다는 언질을 받아내면서 "꼭 되게 해 주소. 지금 전자산업은 앞이 꽉 막혀 있소. 수출도 한계에 이르렀는데, 국내시장이 막혀 있으니 큰 야단났소. 국민여론을 조사해보면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요!"라고 하소연한 뒤, 국보위는 삼성전자와 금성사 양대 업체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8월 1일부터 컬러 TV 시판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컬러TV에 대해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국내 컬러방송을 전제로 시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수출 규제로 턱턱 막힌 국내 가전업계의 숨통을 트이기 위한 정부의 임시 조치였다.

11월 30일에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의 발표에 따라 12월 1일부터 KBS가 수출의 날 기념식 생방송을 시작으로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었다. 첫 컬러방송 당시 정부의 큰 관심사는 전두환의 정장 색이었다. 이에 업계의 전문가들과 비서진들이 협조한 결과 회색 바탕에 가는 청색 줄무늬의 옷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행사 당일 상공부 공무원들은 가전 3사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컬러방영 색상에 대한 반응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뿐 아니라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개도국들 중에는 컬러TV 나이가 동갑이거나 더 늦었던 나라들이 수두룩하긴 했다. 공산권에서도 중국(1973년)이나 윗동네(...)(1974년), 베트남(1978년)처럼 남한보다 더 빠른 나라가 있는가 하면 미얀마(1984년)나 부탄, 네팔, 라오스처럼 더 늦은 나라도 있을 정도다. 서아시아에서는 이스라엘시리아, 터키가 한국과 동갑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컬러방송이 가장 늦었던 나라는 포르투갈로, 한때 식민지로 두었던 나라가 1972년에 개시한 것보다도 훨씬 늦었으며, 대한민국보다는 9개월 빨랐다(1980년 3월 7일). 이스라엘은 노동당 정권이 컬러TV 도입을 반대했었고, 리쿠드당 소속인 메나헴 베긴이 집권하고 나서야 해금되었다.

한국은 1980년 12월 22일에 컬러 TV 방송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지만, TV 수상기 문제가 일어난다. 당시 전국에 깔린 흑백TV 수상기는 전국에 7백만 대나 쫙 깔려 있기에 하루 아침에 수상기 전체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흑백과 컬러 모두를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조명료만 해도 흑백의 네 배나 되는 컬러방송에 쓰는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에 자연광선을 많이 쓰는 뉴스와 스포츠 중계부터 컬러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는 정권홍보에 TV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두환 정권의 책략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결국 당시 한국에서 컬러 텔레비전은 땡전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송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컬러 텔레비전 방송 개시 바로 전날은 언론통폐합이 시작된 일자로, TBC는 컬러송출 100%도 못 해보고 신방겸영 금지로 폐국되었다. 지못미. 그래도 TBC에서 제작된 쇼쇼쇼 700회 특집이라던가 몇몇 드라마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는데, 공연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며 고별방송 프로그램도 컬러로 제작되긴 했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이 흑백으로 봐서 그렇지 .

이듬해인 1981년 초에는 광고도 전면 컬러화되었다. 또 TV의 컬러화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의 '바보상자'나 '판도라의 상자'외에 유해색소까지 첨가된 격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안부인사로 "컬러TV를 구입했느냐"는 말까지 나온 데다가 심지어는 컬러TV 때문에 극장이 망할 거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극장은 망하지 않았지만 당시 침체기를 겪던 우리의 영화산업이 컬러TV 때문에 또 타격을 입었다. 1981년 당시 영화관 관람객 수는 전년도의 5천 3백만 명에서 4천 4백만 명으로 줄었고, 전국 영화관 수는 전년도의 447개에서 423개로 줄어 영화제작 편수 역시 87편으로 나와 저조하였다.

이에 우리 영화계는 컬러TV에 대항해 영화의 대형화란 대안을 모색하여 당대 1억 원 단위로만 제작되었던 통례를 깨고 평균 3~4억 원에서 최고 10억 원까지 투입된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배우들 역시 컬러TV와 동시녹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연기훈련을 기획했고, 영화진흥공사 역시 조감독 20명을 선발해 영화 이론과 기법을 교육시켰다.

이런저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컬러TV는 방영 1년 뒤인 1981년에 37억 9천 1백만 달러를 기록해 전년도 대비 33%를 올려 수출길을 터 주었으며, 당시 주류이던 볼록화면 형식의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은 1980년대 당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1980년대 후반 당시 연령대가 대략 만 5~6세 이상이셨던 분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텔레비전으로 86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 경기 중계 방송을 시청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방영했던 각종 TV 프로나 광고들도 해당한다. 이후로 텔레비전은 크기는 더 커지면서 성능 및 기능은 더욱 향상되어 나왔다.

2.3. 컬러 TV 보급 이후~1990년대

1985년 10월 1일 수도권을 시작으로 음성다중방송이 시작되었다.

늦어도 1990년대부터는 채널을 이동할 때 다이얼이 아닌 버튼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컴포지트 단자가 기본으로 탑재되었다. 1990년대 고급형 기종에는 S-Video 단자도 있었다.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 제품이 주류였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는 25인치/볼록화면, 1990년대 후반에는 29인치/평면화면이 대세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16:9 비율의 와이드 TV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 CRT의 방식으로는 38인치 이상이 될 경우 브라운관의 무게 때문에 더 이상 대형으로 제작을 할 수 없었으므로 기기 아랫쪽에서 상을 비스듬히 쏴올리면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화면에 비춰지는 방식의 '프로젝션 TV'가 고가의 대형 화면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1980년대 초반에도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초고가라 보급이 잘 되지 않다가 1998~99년부터 점차 보급되었다.

16:9 모델과 4:3 모델이 동시에 팔렸다. 프로젝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작되어서 DLP, 3색관 방식 등이 사용되었다.

프로젝션 TV는 기존 CRT에 비해 두께는 같고 대신 아래에서 쏴올릴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높이가 약간 높다. 크기도 크기지만 제법 보급됐던 DLP 방식의 프로젝션 TV는 램프의 수명 문제가 심각했다. 램프의 수명이 다해 밝기가 떨어질수록 화면도 어두워지기에 보통 2년에 1번씩 교체해줘야 하는데 램프값으로 10만이 기본으로 깨지는 환상적인 유지비용을 보여줬다. 더 짧고 더 비싸던데 다른 문제점으로는 시야각. 정 중앙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화면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문제가 심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PDP/LCD TV도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프로젝션 TV보다 고가의 대형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2.4. 2000년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 제품이 주류였으며 볼록화면 형식은 2005년 즈음부터 삼성과 LG에서 국내외 모두 생산을 중단하였다.

DVI/HDMI 입력과 DTV 디코딩으로 HD 해상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프로젝션 TV는 2000년대 초반에 정점을 찍고 중후반부터는 PDP, LCD 패널의 보급과 함께 금방 사장되어버린 과도기적 제품이 되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끔 무료나눔 같은 걸로 프로젝션 TV가 나오면 얼씨구나 업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2013년쯤까지만 해도 크고 저렴하다는 점 때문인지 학교에서 많이 쓰였지만, 수명 문제와 시야각 문제로 요즘엔 전부 LCD패널 TV나 프로젝터로 교체되는 추세다. 램프 교체비용도 많이 들지만 잔고장도 의외로 많아서 여러모로 골치였다. LCD TV가 많이 싸진 마당에 더 이상 굴릴 이유가 없었던 것. 게다가 프로젝터는 작아서 설치하기도 쉽다.

그러나 시장이 LCD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의 LCD는 반응 속도와 가격 문제 때문에 보급이 더뎠다. CRT에서 LCD로 넘어가는 과도기 중 1997~2000년에는 프로젝션 TV가, 2001~2006년에는 PDP가 대형 TV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PDP는 LCD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2014년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2008년까지는 LCD TV의 BLU(back light unit)로 CCFL(Cold Cathode Flourscent Lamp)이나 EEFL(External Electrode Flourscent Lanm)이 많이 쓰였고, 2007년 말부터는 고급형 모델로 CCFL 대신 LED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한 LCD TV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보통 LED 백라이트 LCD TV를 LED TV라고 많이 표현하나 LED 자체에서 색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고, LED는 단지 백라이트 유닛 발광만 담당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LED TV는 잘못된 표현이다. LED 백라이트는 2010년부터 대중화되어 기존 백라이트 유닛을 빠르게 대체했다.

2.5. 2010년대

2010년 이후로 기존 CCFL 백라이트 TV보다 더 밝고 전력 소모도 적고, 더 얇은 팬널의 생산이 가능한 LED 백라이트 LCD TV가 보편적인 백라이트로 자리 잡았다. 2009년 초 3D TV를 시작으로 2010년 이후 스마트 TV가 본격화했으며, 2011년 WOLED 방식의 OLED TV와 OLED와 LED 백라이트 기반의 4K UHD TV, 2013년 커브드(곡면) TV, 2015년 양자점을 백라이트로 이용한 SUHD[19] LCD TV와 HDR을 지원하는 TV가 등장했다. 스마트 TV와 같은 디지털 TV가 새로 등장하고, 2010년대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TV시장에서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LCD 패널의 가격이 급속도로 하락되어 HDTV가 대중화되어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CRT TV는 시장에서 완전히 사장되어 자취를 감추었고,[20] LCD의 라이벌 격이었던 PDP도 LCD에 화질/전력 소모/제품 수명 등에 약점을 보여 PDP TV조차 시장에서 도태되다가 2014년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2010년 S-Video를 시작으로 중반부터는 D-Sub와 D-Sub/DVI 음성 출력 단자가 제외되었으며, 후반부터는 컴포지트와 컴포넌트 단자마저도 점차 빠지고 있다.

또한 이때부터 유튜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019년 기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텔레비전 중 최고급품은 LG전자의 OLED TV와 삼성전자의 QLED TV이다. 삼성전자의 QLED는 LCD에 양자점 필름을 입힌 QD-LCD로 명암비와 색 재현률이 일반적인 컬러 필터를 사용하는 LCD에 비해 우수하다.하지만 거의 비슷한 기술이면서 더 저렴한 LG 나노셀이 있으며,OLED에 편승한 마케팅 용어라는 욕을 먹고 있다.LG전자의 OLED는 공항등 고정화면을 띄우는 경우에 번인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암부 표현능력이 LCD인 QLED에 비해 크게 우수하고 얇으며 롤러블 등 다양한 폼팩터를 구현하기에 좋다.

그리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모니터에 텔레비전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 출시되어 컴퓨터와 같이 쓰는 사람들 때문에 텔레비전은 그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증강현실 장비를 착용할 경우 어디서나 가상으로 TV를 띄워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증강현실 기술의 발전 또한 TV의 도태에 한몫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홀로렌즈로 TV를 시청하는 모습

한국에서는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부터 서울과 경기도권 지역을 마지막으로 1956년 이후 56년간 지속되던 전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에 맞게 2013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디지털 방송 시대가 개막되어 불필요한 HD 로고를 없애고 영상을 16:9에 맞게 제작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 방송 리시버를 달거나, 기존 아날로그 TV를 교체하지 않으면 방송을 볼 수 없다. 다만 기존 아날로그 TV 이용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 임대 방식으로 디지털 → 아날로그 변환 셋탑박스를 제공해 준다. 일반 안테나를 이용하여 TV시청을 하는 가정에만 해당하며 유선방송, 케이블TV, IPTV,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 시청 가정은 해당 사항이 없다. 현재 케이블TV 방송사에서는 아날로그 TV 수신기에 DTV 수신 장비를 달아주는데, 하나는 지상파 DTV처럼 작동하는 방식, 또 하나는 스카이라이프처럼 셋톱박스를 설치한다.

  • 수도권 아날로그 TV 송출 종료 장면 (KBS 1TV, UHF 25) : ##

디지털 수신기 보급이 미비한 북한 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부는 전방 지역의 아날로그 송출을 유지하기로 했다. 기사 1, 기사 2 전파라는 특성상 경기 북부 지역에서도 수신이 가능할 듯 싶다. 가령 송신소가 근처에 있는 동두천시, 연천군이라든가. 단, 북한과 중국의 아날로그 TV 방식은 PAL 방식이라서 한국용 NTSC 방송은 수신 불가능하다. 북한을 향해 송신되는 KBS1 아날로그 전파는 PAL 방식 10번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송출될 것으로 전해졌다. 멀티 시스템 수상기[21] 또는 TV수신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수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북한지역에서는 따라서 PAL방식으로 계속해서 시청중일 것으로 추정된다. 접경지역과 평양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약한 전파로도 멀리까지 신호 전달이 가능한 DTV 특성상 NTSC방식으로 DTV수신을 직접 하는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북한 내부의 태블릿과 노트북 보급도 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이트박스 태블릿 가운데 TV자체수신기능을 가진 모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간 듯하다.링크[22] 다만 평양 거주 상류계층을 제외하고 남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PAL 방식으로 시청하는지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통계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탈북자들이 많이 발생한 곳은 평안북도나 량강도, 함경북도 같은 북중 접경지대라...

KBS1의 PAL 송출 영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등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채널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자체제작하는 프로그램들은 2010년대 들어 진행자의 말씨, 무대 디자인, 방송 연출 기법 등이 영락없는 KBS1의 레귤러 프로다. 다만 이는 한때 인기 있던 위성방송 수신기의 불벌 수입도 영향이 있다.

2.6. 2020년대

2020년 TV 자체가 돌돌 말려 들어가는 TV가 출시되었다.

2010년대 후반부터 더 이상 방송 채널 프로그램들을 보기 위한 것보다는 컴퓨터의 일종으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테면 드라마 같은 경우 넷플릭스를 쓰는 용도로 바뀌고, 현재는 화면 잘나오는 TV에 스마트 셋톱박스를 연결한 뒤에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을 구독하여 TV 방송 대신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을 본다. 아니면 아예 스마트 TV로 자체 앱을 깔든지 스마트폰과 연동하는 경우도 있다.

선술했다시피 인터넷과 유튜브 등에 자리를 내줬고, 1990년대~2010년대 초반과 달리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떨어지고 있다. 요즘에는 지상파 예능에서도 0~1% 대가 나오는 편이며, 10% 이상 받기도 힘들어진 상태다. 그나마 일부 잘 나가는 지상파나 종편, 케이블 프로그램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으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인지라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TV가 늙은 사람들만을 위한 미디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했던 TV 프로그램들이 중장년층으로 타켓을 옮겨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더욱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다. 또한 매번 같은 컨셉이 이어지다 보니 식상함을 느끼는 대중들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 한국 전역을 휩쓸었던 예능, 만화, 개그 프로 등이 이제는 재미없는 방송들만 남아 추억이 되어버린 상황인데, 이대로 가다간 유물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TV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기존의 TV 프로그램들이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TV라는 물건은 TV 프로그램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영상 컨텐츠들을 보는 기기로 바뀌어 가고 있다. 대형 모니터나 프로젝터같은 포지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렇다고는 해도 가정에 TV를 두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모니터로의 사용처 변화 또한 'TV'라는 분류가 의미가 없어지고 흡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한 프로그램이 특정 시간대에만 방영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따로 맞춰 개방된 거실 공간에서 고정된 화면을 바라봐야 하는 기존 공중파, 케이블 구조로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위시로 한 스마트폰이나 PC에 비해 굉장히 불리한 관계로[23], 쇠퇴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즉, 1980년대에 주류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3. 종류/규격

3.1. 디지털 방송

3.1.1. ATSC

디지털 방식으로 미국에서 표준화되었다. 단, 기술 자체는 대한민국 기업이 간접 보유하고 있다. 특허의 대부분을 LG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갖고 있다. LG전자의 경우 미국 자회사인 제니스사가 가지고 있는 거지만. 아무튼 미국식이 한국의 디지털 지상파 TV 방송 방식으로 채택되고 UHD 기술도 DVB-T2에서 ATSC 3.0으로 표준이 변경된 것에는 이런 측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변조방식으로는 8VSB를 사용한다. 2~6ch(54~88MHz)는 사실상 DTV 서비스가 불가능하므로 예비용으로 사용하고 7~13ch(174~216MHz)는 지상파 DMB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었다. 이전에 할당된 698~806MHz는 다른 용도로 분배하기로 결정.

  • 14ch~51ch[25]: 470~698MHz
  • 유선방송 14ch~158ch[26]: 90~174MHz, 216~1002MHz

3.1.2. DVB

유럽 방식.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만, 호주 등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 지상파 표준인 DVB-T와 그 후속인 DVB-T2는 별다른 변조없이 이동수신이 가능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 HD에 특화된 방식은 DVB-T2이지만 대만프랑스호주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DVB-T 포맷으로 HD 방송이 실시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에서는 ATSC에 졌지만 Skylife에서 위성방송 전송방식인 DVB-S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2015년 6월, UHD 방송의 기술검증을 위한 시험방송이 DVB-T2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UHD 최종 표준확정은 복잡다단한 어른의 사정으로 ATSC 3.0로 채택. UHD 표준 채택에는 하위 호환 문제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상파 HDTV 표준이 ATSC이므로 ATSC 3.0을 UHD 표준으로 하면 이 표준의 UHDTV로 지상파 UHD와 HD 모두 시청할 수 있지만, DVB-T2를 UHD 표준으로 하면 UHDTV는 지상파 UHD 전용이 되고 지상파 HD를 시청할 수 없게 된다. UHD 방송 실시 이후로도 HD 방송은 장기간 존속할 텐데, 이렇게 되면 직접수신을 위해서는 심하면 TV를 2대 장만해야 하고, 이를 피하고 UHD와 HD 둘 다 한꺼번에 보려면 유료방송을 피할 방법이 없어 어느 쪽이든 시청자에게 부담을 야기한다. 같은 이유로 만일 한국이 DVB-T를 지상파 HDTV 표준으로 채택했다면 ATSC 3.0은 DVB-T2에 밀려 UHD 표준으로 뽑히기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3.1.3. ISDB

일본과 필리핀, 타이, 몰디브, 남미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디지털TV 전송 방식으로 사단법인 전파산업회(Association of Radio Industries and Businesses, ARIB)에서 관리한다. 모바일 방송으로 원세그가 있다.

3.1.4. DTMB

중국 방식. 중국과 홍콩, 마카오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

3.2. 아날로그 방송

CATV 대역을 지원하는 수상기는 Cable Ready라고 불렀다. 해외에서는 80년도 초반부터 생산하였으나 국내에서는 거의 90년도 중반부터 생산한 듯 하다.[27]

3.2.1. NTSC

한국에서 사용되는 NTSC 방식의 경우 채널당 대역폭 6MHz씩으로 영상은 4.5MHz의 VSB으로 변조하며 음성은 1.5MHz의 대역폭으로 50~15kHz의 음성 신호를 FM으로 변조하여 전송한다. 이론적으로는 주파수만 맞으면 FM 라디오로 아날로그 TV방송의 음성신호를 들을 수 있다곤 하지만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우 라디오보다 주파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채널6번 빼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일부 라디오 제조사들은 수신 대역폭을 넓혀서 '텔레비전 소리[28]'를 들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 VHF
  • 2ch~6ch: 54~88MHz: 원래 NTSC 초기에는 45MHz 대역으로 1ch가 있었으나 미국에서 타 무선통신과 겹친다는 이유로 해당 주파수대역을 회수했다. 또한 대역 특성상 노이즈가 많은 등 TV방송용으로는 영 좋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채널번호가 방송사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채널번호를 하나씩 밀어 재할당하기가 곤란하자 그냥 1번 채널을 비워놓은 채로 표준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한국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미국과 동일한 87.7 ~ 107.9MHz(200kHz)로 87.75MHz에서 6ch의 TV 음성전파와 겹친다. FM라디오[29]에서 SBS TV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유.
  • 7ch~13ch: 174~216MHz
  • UHF
  • 14ch~59ch[30]: 470MHz~746MHz, 휴대이동통신이 800MHz 대역을 사용하는데 채널과 채널 사이다.
  • CATV
  • 2ch~158ch[31][32]: 54~1002MHz Low/MID/HIGH/SUPER/HYPER/ULTRA/JUMBO 대역으로 나뉘며 95 ~ 97ch는 90 ~ 108MHz, 98 ~ 99ch는 108 ~ 120MHz로, MID 대역으로 분류된다.[33]

3.2.1.1. NTSC-J
일본에서는 NTSC를 자국에 맞게 변형해서 썼었다. 채널 1~3번의 주파수 대역이 타국에서는 FM방송[34]으로 쓰는 대역이었기 때문에 1번 채널이 존재했었다. 색온도는 9300K를 사용한다.[35]

  • VHF
  • 1ch~3ch: 90~108MHz: 한국의 FM라디오/CATV 95, 96, 97ch 주파수대역과 거의 중복된다. 당연히 한국제 FM라디오를 가지고 일본의 1~3ch TV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76~90MHz이며 일본에서만 이 대역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과거 국내/해외 수신 가능한 76~108MHz 밴드의 FM라디오를 만들었었다. 해외에서는 FM라디오로, 국내에서는 FM + TV 1~3ch 음성수신용으로. 일본의 아날로그 TV 송출 종료 이후로 일본내수용 라디오는 76~90MHz 대역만 잡히게 제작되었으나 최근 와이드FM 도입으로 다시 76~108MHz 대역의 라디오가 발매되고 있다.
  • 4ch~12ch: 170~222MHz
  • UHF
13ch~62ch: 470~770MHz
c13ch~c63ch(CPR-4103A기준): 108~468MHz, 일본에서는 셋톱박스를 이용한 케이블 방송시청이 보편적이라서 수상기마다 제각각[36]이였다가 디지털 수상기의 생산이후 패스-스루 방식을 지원하면서 드디어 전 대역을 수신할 수 있다.

일본 내수용 TV를 한국에 가져와서 수신을 하면 2~6번 채널을 수신할 수 없었다. 단 채널 미세조정 기능이 있는 경우 운좋게 수신할 수 있다고 한다.[37] 아날로그 케이블 방송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기준 2 ~ 6, 98 ~ 99(C13 ~ C14)[38]번을 제외한 7~64번 채널은 수신이 가능했다. 물론 최대 송출 채널은 미사용 번호가 존재하지만 97번까지 송출한다.

3.2.2. PAL

유럽 방식으로 디지털 전환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폭넓게 이용되었다. 유럽에서는 SÉCAM을 사용하는 프랑스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이 이용했다. 폴란드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등 동구권 국가들도 SÉCAM 방식을 체택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PAL로 방식을 전환했다. 그리고 남/동/북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오세아니아 등에서 정말 폭넓게 이용되었다.

물론 한국/일본의 전파월경을 바라지 않았던 냉전시절 중국/북한도 PAL 방식을 사용. 상당수 국가들은 PAL과 SÉCAM을 동시에 송출했다. 원칙적으로는 NTSC와는 달리 채널 번호 1번부터 사용할 수 있지만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관습적으로 안쓰기도 한다. 참고. 이건 북한도 마찬가지, 그런데 여기는 반미 성향이 강함에도 채널번호 1번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보았을 때 유럽의 1960~80년대 초반 텔레비전 수상기는 동시기 NTSC권 수상기와 채널을 돌리는 방식도 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터리 방식(VHF, UHF 다이얼을 돌려서 채널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프리셋 버튼 방식 즉 자동차 라디오의 숫자버튼과 비슷하게 1에서부터 7까지 임의로 버튼이 있으면 각 버튼마다 일일이 실제 채널을 맞춰주는 방식이었다. 유럽의 몇몇 텔레비전 방송국이 채널 1 비슷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70년대 텔레풍켄 수상기의 채널 버튼)

NTSC와 PAL/SÉCAM과는 주사선 수부터 많은 것이 다르므로 한쪽 수상기로 다른 쪽 방식은 전혀 수신할 수 없다. 물론 가격이 비싼 겸용 수신기를 사용하면 세 방식 모두 수신 가능하다. 주로 중동지역처럼 같은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국가마다 TV 방식이 다른 지역을 위해 이런 수신기를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필요 없다. 과거에 한국에서 북한TV를 보거나 북한에서 한국TV를 보려면 필요 하긴 하다. 그전에 코렁탕

참고로 PAL/SÉCAM의 경우 UHF대역은 모든 지역이 동일하다.

  • B/G, I, D/K: 47~806MHz

4. 매체에서의 텔레비전

여러 매체에선 은근히 호러 쪽으로 자주 묘사되는 주 아이콘. 매체에서 주로 TV 속의 존재가 TV 밖으로 빠져나오는 연출이 자주 보인다.


The Twonky처럼 텔레비전 수상기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는 작품도 있다. 호러라기보단 코미디에 가깝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주파수가 안 잡히거나 스크램블이 걸려 화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 기계의 옆이나 뒤를 쳐서 다시 화면이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어 드라마만화의 클리셰처럼 여겨졌지만, 방송송출이 안정화된 2010년대부터는 그런 현상이 거의 사라졌다. 그 외에 외지에서는 전파를 잡기 위해 기와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안테나의 방향을 고치는 일도 있었다. 나라는 다르지만 아이언맨 3의 개리가 대표적인 사례.

5. 기타

  • >그러니 제 말 들으십쇼. 똑바로 들으십쇼. 텔레비전은 진실이 아닙니다! (Television is not the truth!) 텔레비전은 놀이 공원이란 말입니다! 서커스이고, 카니발입니다! 무용수와 이야기꾼과 가수와 춤꾼과 저글러와 괴물과 사자 조련사와 축구 선수가 놀아납니다! 지루함을 달래서 돈을 쓸어담을 뿐입니다! 그러니 진실을 원하신다면... 하느님에게 가십시오! 상담을 받으십시오!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
>― 영화 네트워크(1976)영상 참조
종종 '바보상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때문에 교사나 교수 같은 교육자 집안에서는 아예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을 즐기는 원룸 자취생의 집에도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가 많다. 1990년 6월 가와시마 키코일본 황실로 시집올 때, 그녀의 친정에 텔레비전이 없어 가와시마 가문의 독특한 교육이 화제가 되었다.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는 저명한 경제학자로 가쿠슈인 대학 교수였으며,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의사, 교수 등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한편 이 '바보 상자'라는 단어는 비단 한국어로만 바보상자인 것이 아니라 영어로도 Idiot box는 텔레비전에 대한 슬랭이다. 이젠 바보 판때기라고 불러야 한다 이 Idiot box를 바보들이 들어있는 상자로 해석해서 만든 것이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바보상자 에피소드. 실제로 에피소드 초반부에 스폰지밥이 커다란 상자를 얻기 위해 커다란 TV를 사는 사소한 서술 트릭도 있다.

단순히 종교적 이유로 텔레비전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실제로도 아프가니스탄탈레반이 집권하고 나서 한 삽질 중의 하나가 세속주의 성향의 TV 방송국들을 모두 폐국시키고 TV를 켜면 쿠란 관련 방송만 나오도록 한 것이 있다. 아랍권에서 위성방송이 발달한 이유도 각 나라에서 이슬람 윤리를 내세워 지상파 방송을 규제한 탓이 크다. 또한 TV에 나오는 대중문화가 프리메이슨 등의 음모론이라는 이유로[39] TV를 없애라고 하는 일부 기독교 목사들도 있다.

허나 움베르토 에코는 인터뷰에서 TV를 바보상자라고 여기는 것은 음악회를 가거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등의 문화적 경험이 가능한 사람들의 생각이고 오지에 살거나 직접적 문화적 경험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TV는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구라고 옹호했다. 실제로 밥값을 걱정해야 할 처지의 빈민들조차 TV는 사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40]

  • 긴급지진속보 등 TV는 위기 상황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 >"텔레비전은 처음 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 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
>― 대릴 자눅(Darryl F. Zanuck). 당시 20세기 폭스 회장
이 말은 현재 와서 희대의 망언으로 회자되고 있다.오히려 TV가 합판 두께가 될 정도로 발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스사는 이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도 뛰어들었고,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프에 인수된 이후 아예 전국 지상파 TV 방송망도 개국한다.

  • 유럽 국가의 텔레비전 방송은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혹은 프로그램과 광고 사이에 아나운서가 음성으로, 혹은 직접 화면에 나와서 다음 프로그램이나 예고편에 대한 해설을 해주는 개념이 존재한다. 다만 직접 화면에 나오는 형태는 비용이나 스튜디오 공간문제 등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추세. KBS TV를 보다 보면 "주말의 KBS 1TV" 따위의 제목을 달고 아나운서나 아이돌들이 주말 편성표를 안내해 주는 것이 있는데, 맹장처럼 남은 유럽식의 흔적이라고 보면 된다. 한때 KBS 1TV도 1990년대 초반까지 프로그램 사이에 아나운서가 나와서 이어질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KBS 1TV 항목 참조.

  •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옛 세대들은 일본식 축약어인 '테레비(テレビ)'라고 부르고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도 테레비는 상당히 익숙하며 흔하게 사용한다. 다른 일본식 표현들은 대부분 사용을 지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나 유독 테레비만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거부감없이 흔하게 쓰이고 있다. 또 1970년대 광고 등에서는 텔이라는 더욱 영어스러운 애매한 표기도 자주 보였었다고.. 아니면 '텔레비'으로 적는 경우가 있었는데 북한은 지금까지도 이게 표준어 표기이다.

  • 2010년대부터 텔레비전이 LCDHD 해상도로 대동단결하고 DVI, HDMI 등의 출력 단자를 채용함에 따라, 컴퓨터와 연결해서 모니터 대용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컴퓨터 모니터에 IPTVHDMI로 연결해 소형 TV로 쓸 수도 있다.단 일부 모니터는 TV용으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피커가 없어서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다.[41]

  • 지금이야 텔레비전 놓는 방향이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었지만, 과거 브라운관 아날로그 TV시절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거실 벽면 가운데에 놓지만, 서양권과 일본은 거실 구석에 대각선 방향으로 놓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요즘 TV는 화면이 크다보니, 대각선으로 안들어간다.

  • 백남준이 TV를 이용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TV 형상을 이용한 것도 있고, 화면에 나오는 그림과 영상까지 포함하는 것이 있다. 해당 문서 참고.

  • TV 보기를 꺼리거나 아예 혐오하고 멀리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있다. 우선 요즘 나오는 티비는 특히나 화면이 커서 전자파(전자기파)를 더 많이 빠르게 쐬느라 금세 피로해지기도 하고[42], 특히 뉴스나 스포츠 중계, 드라마 같은 경우 싫어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시끄럽게만 느끼기도 하며, 여러 정보와 각종 뉴스를 인터넷으로도 요즘 다 볼 수 있는 세상에 사실 신세대는 TV보다는 컴퓨터로 다 한다. 뭣보다 TV는 거실에 두고 컴퓨터는 방에 두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퍼져있어 거실에 가족이 티비 켜서 자기는 관심도 없는 프로그램 틀어두는 것을 시끄러워서 싫어할때가 있다. 특히나 귀가 어두운 중장년 세대들은 음량 더 크게 키워서 문제가 된다. 다만 혼자 살거나 혼자 있는 경우 무섭거나 외로워서 그냥 적당한 음량 수준으로 티비를 켜두기도 한다. 자동 꺼짐 기능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취침하면 알아서 전원종료.

  • 리모컨이 등장하고 TV의 레버가 사라진 지금에도 수신 채널을 다른 곳으로 변경하는 경우 '틀다'는 표현이나 '돌린다'라는 표현을 지금도 쓰는데 이는 옛날 로터리식 TV의 채널을 변경하는 방식이 레버를 직접 틀어서 돌리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을 1976년부터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컬러TV로 바뀌어가고 있던 시기에 방송을 시작하다보니 처음부터 컬러방송을 하였다. 1976년에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것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도 늦었고, 아프리카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국가보다도 늦었다. 이는 남아공에 텔레비전을 도입하기 전의 총리였던 헨드릭 페르부르트가 텔레비전을 악마의 산물로 보고 도입을 거부, 이로 인한 금욕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 위기탈출 넘버원 30회(2006년 2월 25일)에서 TV 추락사고를 방영했다. 지금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30회가 방영했던 2006년 2월 달은 아직 뚱땡이 TV가 많았던 시기였다. 특히 뚱땡이 TV는 압사 사고의 위험까지 있다.

6. 관련 문서


[1] 망원경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telescope다.[2] 일본식 발음[3] 영국식 애칭 및 속어.[4] 다만 텔레비전을 최초로 상용화한 인물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막상 생전에는 크게 이득을 보지 못했다. 우선 자신이 주력했던 기계식 텔레비전이 표준이 되지 못 방송사를 차릴려고 전 재산을 털어놓았다가 화재로 인해 빈털터리로 전락했던데가,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 대전이 겹쳤을때라서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결정적으로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도전인 1946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후에 TV방송을 개시한 나라가 하나둘 생겨났을때였기 때문에 조금만 오래 살았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등 최소한의 과실을 따 놓을 공상이 크지만 오래살지 못해서 그 과실을 맛보지 못한 예이다.[5] 독일 제2공영 ZDF의 F가 이것이다. 즉 ZDF=Zweite(2nd) Deutsch(독일) Fernsehen(TV).[6] 해당 제품을 리뷰한 영상이 존재하는데, 색원판이 돌아가는 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거슬렸다. 한밤중에 고요한 방에서 컬러 방송을 보는데 색원판 모터 소리가 크게 난다고 생각해보자. TV 소리를 어느 정도 키워야 그나마 낫지만 이번에는 TV 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가 된다..[7] 단자/영상 항목에서처럼 크로마값이 S단자부터 다르거나 그보다 고급은 신호를 뭉개지 않고 나눈정도 차이가 나는데 S단자차럼 FM라디오와 동일한 음성대역을 간섭없이 준 것이 아니어도(컬러신호대역이 온전히 들어갔다.) RCA가 상대적으로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무선송출을 제외하고 보더라도(케이블티비가 공청보다 선명하긴 하지만...) 선명해지긴 한다.[8] 70년대 후반에는 99% 이상의 방송이 컬러였다고 한다. 80년대에는 100% 였다.[9] 기존 TV보다 전력소비량 30% 감소, 수명 2배, 선명도 10% 증가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광고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해당 TV는 보급형이 아닌 프리미엄급 TV에 속했다.[10]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긴 했지만 당연히 품질은 좀 떨어졌다.[11] 세계적으로는 네덜란드 필립스, 일본 NEC에 이어 세 번째다.[12] 화면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일그러지는 현상.[13] TV를 끌 때 브라운관 형광막이 타들어가 점 모양 불빛이 3~4초간 뜨는 현상. 이럴 경우 수상기 수명이 줄어든다.[14] 화면이 쉽게 흐려지거나 얼룩지는 현상.[15] 당시 파나소닉과 제휴했다.[16] 70년대 당시에도 음악방송과 스포츠 경기 등은 컬러로 송출이 되었다 전면 컬러화가 아닌거지 컬러 송출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인데, 2000년대 HD편성같이 일부 방송은 컬러로 나왔다.[17]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냥 카더라라고 생각하면 된다.그렇다면 왜 컬러방송 전면금지를 하지 않았을까?[18] 단, 해외 근무자가 이삿짐으로 옮겨올 경우 제외.[19] 삼성전자 측의 마케팅 용어이다. 이후 LG전자에서도 같은 단어를 마케팅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리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SUHD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삼성전자는 2017년 들어서 플래그쉽 TV 라인업에 사용하던 SUHD라는 이름을 QLED라는 이름으로 변경한다.[20] 삼성은 2007년, LG는 2010년에 국내에서 볼록/평면 브라운관 생산을 전면 중단하였다.[21] 중소기업 TV들은 대다수가 멀티시스템을 지원하지만 입/출력만 지원하며 유럽에서 PAL방식 VCR을 직구하여 연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22] 이런제품들은 타국가로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경우로 인해 멀티 시스템 튜너를 내장하고 있다.[23] 당연히 TV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지만, 검색 시 리모컨으로 한글자 한글자 누르는 불편한 시스템이 많아, 현재의 TV는 딱히 휴대폰과 컴퓨터보다 뛰어난 점도 없다는 게 사실이다. 간단한 시스템으로 어르신들이 조작하기 쉽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남은 장점이기는 하나 이 또한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더 간단하게 되어 있다.[24] 텔레비전 기능이 있는 제품 한정.[25] 규정상 69ch(806MHz)까지나 실제로는 51ch까지만 사용[26] 2005년 이전 출시된 TV는 125ch까지, 2006~2013년 출시된 TV는 135ch까지 지원한다.[27] 국내에서 생산된 Cable Ready 수상기중 2 ~ 36CH, 95 ~ 99CH를 수신할수 있는 수상기가 있는데 이것은 NTSC-J 수상기(1CH ~ C35)의 MCU에서 NTSC-M VHF-Low 대역을 추가하여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생산된 수상기는 2 ~ 79CH 또는 2 ~ 125CH까지 가능하며 최근에 나온 수상기들은 2 ~ 134CH를 수신할 수 있다.[28] 이걸 응용해서 일본(5 ~ 6CH)이나 OIRT FM(3 ~ 4CH)을 청취헐수 있다.[29] 87.7MHz로 시작하는 미국 내수용 카오디오도 가능.[30] 83ch(~890MHz)까지 할당되어 있으나 규정상 69ch(~806MHz), 실제로는 59ch(~746MHz)까지만 사용. 하지만 일부 지역의 중계소처럼 60ch대에 배정된 경우가 있다.[31] 국내에서는 100ch 이상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32] 2005년 이전 출시된 TV는 125ch까지, 2006~2013년 출시된 TV는 135ch까지 지원한다.[33] 한국에서는 2011년도 까지 유휴대역으로 분류되었다. 사유는 음악유선방송, 항공기 무전과 겹친다는 이유때문인데 음악유선을 제공하는 종합유선방송이 드물었고 겸업하던 중계유선방송은 종합유선으로 사업변경, 폐업 등으로 축소되어 유휴대역이 되어버렸다.[34] 한국을 포함한 M방식 국가들은 CATV 95 ~ 97ch[35] 기존의 NTSC-M은 6500K.[36] SONY: ~C35, JVC: ~C38[37] 다이얼 식인경우[38] 유휴대역이다.[39] 가장 대표적인게 아이돌 가수들이 루시퍼 등을 내세운다는 이유.[40]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참고.[41] 그대신 외부스피커 단자가 있는 제품이 있어서 스피커를 연결하면 된다.[42] 다만 전자기파의 인체 유해성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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