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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추존 황제
헌종 성황제 | 憲宗 成皇帝
조선 제24대 국왕
憲宗 | 헌종
파일:R6NuURZ.jpg파일:R6NuURZ.jpg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헌종장숙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憲宗莊肅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헌종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
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
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묘호 헌종(憲宗)
존호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
시호 조선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대한제국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장숙(莊肅)[1]
출생 1827년 9월 8일 (음력 7월 18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즉위 1834년 12월 18일 (음력 11월 18일)
조선 한성부 경희궁 숭정문
사망 1849년 7월 25일 오시 (오전 11시 ~ 오후 1시) (음력 6월 6일)
(21년 10개월 17일 / 7992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능묘 경릉(景陵)
재위 조선 왕세손
1830년 10월 31일 ~ 1834년 12월 18일
(음력 1830년 9월 15일# ~ 1834년 11월 18일)
조선 국왕
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
(음력 1834년 11월 18일 ~ 1849년 6월 6일)
(14년 7개월 7일 / 5,33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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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생애
2.1. 수렴청정
2.2. 짧은 친정
2.3. 요절
3. 평가
3.1. 안동 김씨의 평가
4. 어진
5. 가계도
6. 경릉
7. 여담
7.1. 조선의 사랑꾼?
7.2. 기타
8. 매체에서
9.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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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성황제(成皇帝), 휘는 환(烉), 자는 문응(文應).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이다.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王世孫)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2]. 같은 경우로는 고려충목왕이 있으며 충목왕 역시 즉위 당시 8살이자 최연소였다.

영조-정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조부에서 손주로 권좌가 이어지는 조손 계승의 절차를 밟았다.

기존 학계의 견해로는 헌종조 전반을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간의 알력다툼이 치열했던 시기로 정의지었으며 그에 따른 야사도 존재했으나 이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다. (문서 하단 참고)

2. 생애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3] 헌종 대왕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한다. 또한, 출생일에 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궁에선 기이하다고 했다.

여담에서 더 자세하게 언급되지만,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꿀보이스를 가졌다고 하며 백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4] 유아기 때 천자문 백여 자를 뜻을 배우고 외웠다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못 믿었다. 이후 소문의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시험했음에도 헌종은 통과했고, 오히려 아버지 효명세자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보다 학문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고.

세손 생활 4년만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살에 비명횡사하듯 갑작스럽게 죽고, 고작 4살의 나이에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44살에 죽고[5] 세손인 현재의 헌종이 이어받게 된다. 8살,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한편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삼정의 문란이 극심)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2.1. 수렴청정

순원왕후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6]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조선인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46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

더욱더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7]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왕권도 헌종조 초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이였다. 즉위 2년인 1836년 남응중, 1844년에는 민진용[8]과 이원덕 등이 사도세자의 서출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9] 이 역모의 특징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몰락한 양반들의 계획으로, 이만큼 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2.2. 짧은 친정

견해와 달리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경빈 김씨)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풍양 조씨의 부상과 함께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야사에선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경쟁 시기 정도로 비추어진다. 일례로, 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를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나서 다행인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0]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조씨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11]

헌종은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이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反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다.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은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며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 영의정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당한다. 5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역으로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재위 말에는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1848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치적을 세우기도 했다.

2.3. 요절

세도가 안동 김씨를 열심히 조져가며 왕권을 힘겹게 다잡아가던 헌종은 1849년 7월 25일(음력 6월 6일) 향년 2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헌종은 어느 순간부터 피를 토하며 소화 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고 얼굴에 갈수록 심한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을 통해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하며,이는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평소 녹용 등 한약재와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복용하였단 일화로 미루어 급성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젊은 아까운 나이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정조의 마지막 남자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3. 평가

세간의 평가와 달리 어린나이임에도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가문을 제어하는 노력이 성공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군권을 장악하고, 각종서책 간행을 하였다. 동시에 수령의 뇌물문제를 건드려 민생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기울어가는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3.1. 안동 김씨의 평가

실제로 안동 김씨에서 헌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증거는 많다. 특히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이자 헌종의 친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12]을 보면 헌종과 안동 김씨였던 순원왕후가 의외로 상당한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13][14]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원왕후의 2차 수렴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 등을 언급하였다.

4. 어진

헌종의 정식 어진은 1954년 12월 26일에 부산 용두산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만 조선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놓은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서 헌종의 초상화를 찾을 수 있다.[15]

파일:R6NuURZ.jpg파일:R6NuURZ.jpg 파일:atjcwJl.png파일:atjcwJl.png
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헌종 초상화

5. 가계도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강화도령 철종을 옹립한 요인이 되었다.

6. 경릉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三連陵)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17]'의 원칙에 따라 맨 왼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7. 여담

7.1. 조선의 사랑꾼?

  • 야사에 따르면 헌종은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여하튼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 헌종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소리도 좋았다는 뜻이다. (다만 17세때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있다) 실록에 헌종이 즉위할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6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것입니다. 선묘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라면서 언급된다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헌종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선 말한 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식으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실록보면 알다시피 헌종이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했다 것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인들은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젊은 임금은 외모와 상관없이 궁인들의 관심대상이었다. (승은 받기가 더 수월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또 지나치게 성관계를 했다하는 카더라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그가 궁인들을 가까이 한 것은 욕구 이전에 '안동 김씨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겠다. 어떻게든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18]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7.2. 기타

  • 할머니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 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 좋은 외모에 영민하고 재능도 있는 편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20대 초반에 요절한 등 여러 모로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은 왕이다. 승하 당시 나이도 효명세자보다 불과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고. 실제로 효명세자와 헌종은 많이 닮은 외모였다고 하며, 위에 상술되었듯이 4살 때 떠나보낸 아버지를 그리워했는데 본인이 효명세자의 초상화보다도 효명세자를 더 닮았다는 말을 듣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8. 매체에서

한때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 번도 등장하지 못했던 왕이었다.[19] 2018년 이전에는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었다. 아내 효정왕후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배우 김정하가 연기했다.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더불어 사극에 등장할 한 적은 있다.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 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2016년 KBS에서 드라마화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세자로[20] 설정이 바뀌어서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 역시 등장하지 않게 된 것.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 (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 <반월의 나라>의 메인 남주가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나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드디어 2018년 2월에 개봉한 영화 흥부에 출연하게 되었다. 담당 배우는 정해인. 참고로 실제 배우가 정약용의 직계 6대손인데 정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정약용의 6대손이 정조의 증손자 헌종을 연기하는 것이 뭔가 묘한 느낌을 준다.

2018년 9월 개봉한 명당에서 드디어 주요 인물로 출연하였다. 담당배우는 모델 출신 배우 이원근. 시사회와 제작보고회를 통해 "슬프고 유약한 왕," "울분에 찬 젊은 왕"이라고 소개되었고 작중에서 흥선군과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을 회복하려 하지만 이미 군부까지 장악해 둔 김좌근에게 밀려서 반말로 까불면 세자와 함께 죽이겠다는 협박을 듣고 김좌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고 사실상 퇴장한다. 영화 막바지에 안동 김씨들의 음모로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독살당한다. 명백히 고증 오류다. 헌종에겐 아들이 없었고, 오히려 이 때 신나게 안동 김씨들을 조지고 있었다.

9. 같이보기


[1] 대한제국 설립 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2] 이와 대조되게 가장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는 태조 이성계. 그는 즉위 당시 나이가 58세였다. 아들인 정종도 42살에 즉위.[3] 정통성이 아주 강했다는 증거.[4] 물론 한 나라의 얼굴이자 지도자인 왕을 띄워줄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5] 조선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평균 수명은 46살이여서, 순조가 빨리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원래라면 순조 사망 당시 26살인 효명세자가 이어받는게 맞지만, 이미 4년 전인 1830년 죽었기에...[6]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7] 헌종 즉위년 11월 20일 첫번째기사 '기호 지방에 제수의 복정을 특별히 늦추게 하다'와 동년 11월 28일 첫번째 기사에는 '한성부의 하속들이 주구하고 징색하는 폐단을 범하지 않도록 신칙하다'라는 기사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별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8] 집안은 몰락한 노론이어서 신분은 중인이었다고 한다.[9] 이 역모로 인해 회평군은 사약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이복동생들인 철종영평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10] 훗날 서재필고종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도 지독한 근시였지만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한다.[11] 조병구의 졸기에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게 흠이었다'고 되어 있다.[12] (헌종이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13]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 사회의 동요>, 2012년)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 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안동 김씨가를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14] 안동 김문의 김흥근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에게 질타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에서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 안동 김문을 배제하도록 조언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가문과 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15]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23살에 요절한 헌종의 초상화라고 보기엔... 참고만 하도록 하자. 비슷한 나이대인 연잉군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상당히 노안이다.[16] 헌종의 유일한 자녀였다.[17] 오른쪽에 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18] 초상화를 말하며 당시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정확히는 효명세자의 어진을 말한다.[19] 비슷하게 인지도가 떨어지는 예종남이와 연루, 인종문정왕후와 연루되어 사극에 자주 나왔고, 하다못해 왕이 아닌 아버지 효명세자도 퓨전 사극에서 등장해 인지도를 높였다.[20] 이름은 효명세자와 같은 '이영' 그대로인데 한자를 바꾸어 음만 같은 동명이인이 되었다.

[틀:문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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